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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Jul 22. 2021

대서大暑

07.22.(양력), 태양 황경 120°

더위가 가장 심한 절기다. 더위를 피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계곡이나 산정을 찾아가 노는 풍습이 있다. 때때로 이 무렵 장마전선이 늦게까지 한반도에 동서로 걸쳐 있으면 큰 비가 내리기도 한다. 불볕더위, 찜통더위도 이때 겪고, 농촌에서는 농작물 관리에 쉴 틈이 없다. 참외, 수박, 채소 등이 풍성하고 과일은 이때가 가장 맛있다.(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지난주에 한 라디오 방송을 녹음했다. 주말 오전 6시에 송출된다는데 그래서인지 아직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프로그램이다.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 P) 개관 1주년 기념 공개방송이었고 코로나 확산으로 거리두기 4단계가 되는 바람에 관중 없이 출연자들만 녹음했다. 그래도 긴장되는 건 똑같아서 차라리 관중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조금 덜했을까, 아니면 더 심했을까 궁금하긴 하다. 아무튼 그 덕에 변화 없는 내 삶에 이처럼 기록할 만한 특별한 이벤트 하나가 생겼다.  


녹음 일주일 전에 대본을 받았다. 질문을 숙지하고 대답을 정리할 시간이 충분했다. 답변을 다 정리했다면 읽는 연습은 필수다. 무언가를 보고 읽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말하듯이 읽어야 하고, 무엇보다 빨리 말해야 한다. 말하는 속도가 원래 느리다 보니 평소보다 빠르게, 내가 느끼기에 약간 숨이 벅찰 정도로 말해야만 남들과 그럭저럭 비슷한 속도를 맞출 수 있다. 언젠가 한 라디오 PD로부터 들은 말인데, 라디오 PD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방송 중에 마가 뜨는 거라고. 대답하기 전에 몇 초간 소리 없이 생각하는 게스트가 가장 두렵다고…. 나도 내가 그런 게스트가 될까 봐 두려웠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그것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면 반복해서 연습하는 것뿐. 다행히도 녹음은 큰 사고 없이 마쳤다. 다음은 녹음을 위해 미리 작성해둔 답변이다.


1. 인사와 함께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해주시겠어요?


“안녕하세요? 저는 1인 출판사 ‘임시제본소’를 운영하면서 글도 쓰고 책도 만드는 강민선이라고 합니다. 소개를 덧붙이자면 임시제본소는 언제나 멋진 작가의 멋진 작품을 흉내 내고 싶어 하지만 결국에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늘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곤 하는데요, 거기서 오는 어떤 특별함? 애잔함? 같은 것을 무기로 계속해서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원래는 이렇게 작성했지만 좀 튀는 것 같아서 하루 전에 고쳤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임시제본소를 대표하는 소개 멘트로 삼기엔 지나치게 자조적이랄까. 원래 자조적인 말을 잘 긴 하지만 아무래도 공개적인 자리에서 내뱉기엔 조심스러워서 두 번째 안을 작성했다.  


- 두 번째 안 -


“안녕하세요? 저는 1인 출판사 ‘임시제본소’를 운영하면서 글도 쓰고 책도 만드는 강민선이라고 합니다. 임시제본소라는 이름은 제가 처음에 책 만들겠다고 집에서 인쇄하고 바느질하고 칼질하고 있는 걸 보고 함께 사는 가족이 지어주었고요, 출판사를 운영하고는 있지만 사무실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제가 있는 곳이 곧 사무실이기 때문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잘 쓰고 있습니다.”


두 번째 역시 사실이지만 여러 번 읽다 보니 스멀스멀 자조가 풍겨나왔다. 천성은 어쩔 수 없는 건가. 재미도 별로 없는 것 같아서 실제로 녹음할 땐 그냥 무난하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물론 그 대답도 녹음 한 시간 전에 미리 작성해둔 거였다.


2. 처음부터 작가로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직장 생활을 하시다가 작가로 나서게 되셨는데요. 어떤 계기가 있었고 어떤 경로를 거치셨는지 궁금하네요.


“저는 원래 작가가 꿈이었어요. 문예창작과에 들어가서 소설도 쓰고 신춘문예에 계속 내보기도 하고 그랬는데 안됐죠. 그러다가 도서관에 입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아무래도 책과 함께 있다 보니까 독립출판물이란 것도 알게 되고, 그때 제가 만난 책들이 너무 신선하고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자연스럽게 만들게 된 것 같아요. 한 권, 두 권 재미로 만들다가 도서관을 그만둔 해에 출판등록과 사업자등록을 하고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대답은 몇 군데 조사나 부사만 빼고는 준비한 그대로 읽었다. 말로 하든 글로 쓰든 이와 같은 대답을 지금까지 족히 스무 번은 하지 않았을까 싶다. 외울 수도 있다. 인생 전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나의 작가 인생을 두세 문장으로 요약하면 딱 이 대답이 될 테니까.   


3. 강민선 작가님은 직접 쓰신 책을 직접 출판하기도 하고, 다른 출판사에서 내기도 하는데 각각의 경우 어떤 차이가 있나요?


“가장 큰 차이가 있습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 저는 글만 써도 된다는 거죠. 출판사에서 편집과 디자인, 인쇄, 홍보, 유통, 정산까지 알아서 다 해주시니까 저는 너무 편한 거예요. 반대로 제가 직접 만들어야 할 때는 이걸 다 제가 하죠. 혼자 하는 걸 고집한다기보다는 사실 비용 문젠데요. 소규모 독립출판이다 보니까 얼마나 찍을지 또 얼마나 팔릴지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빌리기가 어려우니 웬만하면 제가 하는 거죠.”


녹음할 땐 여기서 그쳤지만 사실은 대답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차이가 있는데요. 출판사에서 낼 때처럼 저 자신이랑 계약을 하는 것도 아니고 마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진행이 좀 늘어질 수가 있기 때문에 혼자 할 때는 좀 더 저를 혹독하게 다루는 측면이 있습니다. 일종에 심리적인 압박을 가하는 건데요. 저 스스로에게 지금 아니면 안 돼, 나중에 몸이 아플 수도 있고 무슨 일이 생겨서 글을 못 쓰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까 지금 할 수 있을 때 해, 이런 식으로 주입시키는 편입니다.”


두 번째 대답을 건너 뛴 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였고 그걸 감수하고도 도전해볼 만큼 재미있지도 않아서였다. 재미없는 말을 길게 하고 싶지 않아서 자체 편집했는데, 근데 나 왜 자꾸만 재미를 추구하는 걸까? 개그맨도 아닌데 왜?


사실 이 순서에는 예측 못한 변수가 있었다. 이 질문을 한 박태근 모 출판사 본부장이 질문의 앞부분을 살짝 바꿔서 던진 것이다! 그 순간 정신이 혼미해진 바람에 정확한 질문이 떠오르지 않지만 대략 이런 질문이었다.


3-1. 강민선 작가님은 직접 쓰신 책을 직접 출판하기도 하고, 다른 출판사에서 내기도 하는데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잘 될 것 같은 책은 본인이 낸다든가?


약간의 농담과 유머가 섞인 위트 있는 질문이었지만 내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미리 보내준 3번 질문과 즉석에서 받은 3-1번 질문은 엄연히 달라서 준비한 답변을 그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단지 질문이 달라서만은 아니었던 게, ‘잘 될 것 같은 책은 본인이 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얼른 와 닿지 않았다. 잘 될 것 같은 책? 그런 걸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거다. 잘 될 것 같은 책이라…. 뜻밖의 질문에 허둥대긴 했지만 박태근 모 출판사 본부장은 아주 좋은 사람이다.     


4. 플랫폼 P가 작업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 또 어떤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시는지?


“저는 무엇보다 매일 출근할 수 있는 쾌적한 작업 공간이 생겼다는 게 가장 좋고, 그다음이 소속감이었어요. 사실 여기서 글 쓰면서 아무하고도 얘기를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웬 소속감? 이럴 수도 있는데, 여기가 개인 작업실이면서 운영자와 관리자가 있고 공용 공간도 있고 소모임도 있는 하나의 공동체잖아요. 혼자 일하다가 심리적이든 물리적이든 어떤 어려운 일에 봉착했을 때 적어도 출판과 예술 분야에 관해서는 의견을 구해볼 만한 곳이 생겼다는 느낌? 아직 그런 적은 없지만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청해야겠다, 그렇게 혼자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작가에게 그런 곳이었으면 좋겠고요. 네, 이상입니다.”


대본에 나와 있던 질문은 이 네 개뿐이었다. 이제 마무리하고 일어서기만 하면 되는데,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간이 남았는지 대본에는 없던 질문을 세 개나 더 받았다. 질문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5. 최근에 하고 있는 작업은?

6. 최근에 읽은 책을 소개한다면?

7.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정말 잘 했다고 생각할 때는?


원래 있던 질문을 살짝 바꾼 정도가 아니라 대본에 없던 질문이 나오자 이번에야말로 진실로 당황했는데 내가 당황했다는 사실을 진행자가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세 질문 모두 나의 답변 순서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앞서 두 출연자가 척척 대답하는 동안 나는 그들의 순발력에 깜짝 놀라면서 동시에 내가 해야 할 말을 생각해내야 했다. 평소에 이런 일이 잘 없기 때문인지 그 짧은 순간에 내 모든 혈관과 세포를 동원해 쓸 수 있는 에너지의 최대치를 끌어다 쓰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대답을 마쳤고, 그 후로 머릿속에서 수십 번을 복기한 탓에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기에 옮겨 적을 수 있을 만큼 다 기억하고 있지만 미리 써둔 답변이 아니니 이 세 개의 질문에 대한 답은 SBS 러브FM 《김선재의 책하고 놀자》 7월 24일자 방송에서 직접 들어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려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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