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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Sep 23. 2021

추분秋分

09.23.(양력), 태양 황경 180°

태양이 추분점秋分點에 이르러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지는 절기다. 추분이 지나면 점차 밤이 길어지기 때문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날이기도 하다. 추분에 부는 바람을 보며 날씨 점을 쳤는데, 바람이 북서쪽이나 남동쪽에서 불어오면 다음 해에 큰 바람이 있고, 북쪽에서 불어오면 겨울이 몹시 춥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추분에 한해의 농사가 잘 된 것을 감사하는 영성제靈星祭와 수명장수를 기원하기 위해 초제醮祭를 지내기도 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1

노트북이 숨을 거두려고 한다. 꼭 사람처럼. 갑자기 망가져서 못 쓰게 되지 않고 조금씩 신호를 보내는 게 마치 “이제 슬슬 백업 좀 하지 그래?”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니 슬프네. 구글 드라이브에 백업을 해두었고 구글 문서라는 것을 처음 사용해보았다. 노트북은 2014년 LG에서 출시한 ‘그램(gram)’이다. 당시 가볍고 얇은 초경량 노트북으로 무게가 1킬로그램이 되지 않는 980그램인 것이 강점이었다. TV 광고가 인상적이었는데 노트북의 무게를 숫자로 표기하고 시각적으로 보여준 첫 광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해 생일선물로 박수영이 사주었다. 사준 사람과 쓰는 사람의 염원이 깃든 이 14인치 노트북은 그 후로 7년 동안 많은 일을 해냈다. 노트북에 대해 얘기하는 건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얘기하는 것과 같아서 어떻게 시작해서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러 가지 감상을 하나의 단어로 대표해서 말할 수 있다면 “고맙다”이다. 고맙다. 나의 모든 이야기를 잠잠히 다 들어주고 담아주어서. 7년 간의 여정을 기꺼이 따라다녀 주어서. 책을 만들어주어서….      


2

오랜만에 고등학교 때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홍대, 한 친구는 노원, 또 다른 친구는 경기도 이천에 살아서 약속 장소를 대략 중간 지점인 잠실의 한 카페로 정했다. 이천 사는 친구가 집 앞에서 잠실까지 오는 직행버스가 새로 생겼다며 좋아했다. 오랜만에 가본 잠실은 엄청나게 크고 뻥 뚫려 있었다. 연일 쾌청한 가을 날씨를 자랑하던 하늘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날만 비가 왔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아래 롯데월드 캐릭터 인형인 로티와 로리가 거인처럼 서서 웃고 있는 모습이 살짝 기괴해 보이기도 했다. 석촌호수를 왼편에 두고 600미터 정도를 걷는 동안 두어 번쯤 걸음을 멈추고 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멋진 산책길이었다. 전철을 타고 20개 역을 지나서 여기 또 오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모르겠기에 지금이라도 잘 봐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석촌호수와 호숫가를 둘러싼 가로수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2층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와 쿠키를 시켰다. 친구들과 만나 얘기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사람 자체를 만나는 일이 거의 없으니 약간 어색하기도 했지만 오래된 친구들이다 보니 금세 익숙해지고 편안해졌다. 우리는 그간 나누지 못한 일신의 변화, 부모님과 가족, 세월의 흐름 등에 대한 얘기를 나누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코로나 블루가 화두였는지 어땠는지 우울한 기분에 대해 말하다가 얼마 전에 도서관에 다녀온 얘기를 꺼냈다. 필요한 책을 찾아 처음 가게 된 도서관이었는데 그날 사서가 너무 불친절했다고, 그게 서운하고 속상했다고 말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와아, 이게 이럴 일인가, 큰일 났네, 한번 터지면 계속 우는데…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무 말도 못하고 티슈로 눈물만 닦아냈다. 말을 멈춘 사이 친구들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도 하고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것 같다며 비슷한 경험을 말해주기도 했다. 다정함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면서 나조차 내 기분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도서관이든 카페든 어디서든 일하는 사람에게 친절함까지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고, 그저 신속하고 정확하기만 하면 된다고 늘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정작 친절함의 유무에 기분의 문제가 개입하는 나라는 시스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작은 부딪힘에도 심각하게 타격을 받는 내 성격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사서에게 물어보지 않았다면 속상할 일도 없었을 텐데. 결국엔 자책으로 마무리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랬던 적이 있었겠지. 너무 바빠서, 너무 힘들어서. 그게 다 돌아오는 거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 친구는 차라리 그 앞에서 화를 내거나 뒤에서 민원을 넣어보지 그랬느냐고도 했지만 친절함이란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누가 알까.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도서관 사서 실무』에서 사서라는 노동자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도서관의 말들』에서는 도서관과 사서를 예찬하던 사람이 어떤 도서관 사서의 못마땅한 태도에 말 한마디 못 하고 속이 상해서 울어… 너무 슬퍼해…. 부끄럽지만 이게 지금의 내 모습이다. 그런 일로 한참 운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다 느꼈는지 노원 사는 친구가 넌지시 말했다. “민선아, 앞으로 힘든 일 있거나 하면 나한테 연락해.”


돌아오는 길에 눈앞에 롯데타워가 우뚝 솟아 있는 게 보였다. 가까운 곳에서 실물을 보기도 처음이었지만 비와 안개 때문에 끝까지 다 보이지 않는 게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드니 빌뢰브의 영화 《컨택트》에서 본 미확인 비행 물체 같다고 생각했다. 있지 말아야 할 곳에 엉뚱하게 와 있는 것 같은. 잠실로 약속 장소를 정하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게 롯데타워였지만 거기로 정하지 않은 건 잘한 일 같았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에 카페 근처 식당에서 잔치국수와 해물파전을 먹었다. 비 오는 날씨와 잘 어울렸고 맛도 좋았다. 다음엔 꼭 날씨 좋은 날에 보자고, 같이 산책도 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집에 거의 다 왔을 때쯤 홍대 역 근처 건널목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모르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뜬금없는 생각을 했다. 누구에게도 함부로 대하지 말자고. 지금 나와 함께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곧 스쳐 지나가고 말 이 사람들이 당장 어젯밤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우느라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스스로 세상과 작별하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견디고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이들에게 오늘 하루가, 이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러니 이왕이면 친절하게 대하자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그냥 그렇게 하자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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