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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Dec 07. 2021

대설大雪

12.07.(양력), 태양 황경 255°

동지와 함께 한겨울을 알리는 절기로 농부들에게는 일 년을 마무리하면서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농한기農閑期이다. 가을 동안 수확한 곡식이 곳간에 가득 쌓여 있어 당분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성한 시기다. 대설에 눈이 많이 오면 다음해에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여긴다. 또한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는 말처럼 보리를 덮은 눈이 온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동해凍害를 입지 않아 보리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6년 전 대설 즈음에 나는 사서 연수 중이었다. 1박 2일로 가는 서울시 공공도서관 사서 연합 모임이었는데 내가 다녔던 도서관에서는 어쩌다 보니 나 혼자 참석했다. 그때 나는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계약직 신분이었다. 대개의 경우 그런 자리에는 정규직 사서만 참석했는데 그해 내가 어떤 공공사업의 담당자이기도 해서 결과 보고 차 참석할 수밖에 없었고, 함께 가기로 되어 있던 직원들은 각자 급한 업무로 하루나 이틀 전에 불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직에 머문다는 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의 연속이 아닌가 싶다. 나는 출근할 때보다 더 일찍 일어나 짐을 챙겨 시청역 서울 도서관에서 출발하는 전세 버스에 혼자 올라탔다. 중간에 휴게소에 들를 때에도 혼자 화장실에 다녀왔고, 남들 다 사먹는 주전부리도 먹지 않았다. 버스 안에서는 멀미 때문에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이나 팟캐스트를 골라서 들었다. 잠을 자다가 깨다가 했다. 정확한 연수 장소는 잊었지만 경상도 어디쯤으로 기억한다. 눈이 하얗게 덮인 드넓은 문경새재를 다 같이 돌아보는 동안에도 혼자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몇 장면이 있다. 첫째 날 오후, 분야별 사업 보고 시간에 나는 보고를 다 마친 뒤 이때다 싶어 사업 담당자의 고충을 덧붙였다. 하나의 사업을 시작하고 그 안에서 계획했던 결과를 기대하려면 장기간이 필요하고 그동안 이를 책임지고 진행해줄 담당 사서의 역할이 무엇보다 큰데 그런 사서의 안정이 보장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처럼 계약직 사서는 고용 자체가 불안하고 담당자가 바뀔 가능성도 높다, 하지만 한 도서관에서 해내야 할 사업이 너무 많고 인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에 계약직이라고 피할 수가 없다 등등. 서툴기 짝이 없는 계약직 사업 담당자로서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는 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공식적인 자리를 빌려 해보았지만 시원하기는커녕 뭔가 답답했다. 다들 뭐 저런 당연한 소리를 하나 싶은 얼굴이었다.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그런 일은 아주 오래전부터 도서관계에 자리잡아 온 관행으로 아무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 한다는 것을.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일단 자리를 보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 앞에서 복지나 처우는 나중 얘기라는 것을. 물론 그때는 앞으로 3년쯤 뒤에 도서관 얘기를 써서 책으로 낼 거라는 것도, 그 한 권으로 공공운수노조와 만나게 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날의 나는 사업 보고가 끝나고 먹은 것 없이 체하는 바람에 저녁을 굶었다. 주최측에 말해서 약을 얻은 뒤 혼자 숙소에 돌아와 물과 함께 삼켰다. 자리를 깔고 누웠다. 여러모로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롭기도 했지만 이 상태로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을 것 같았다.      


저녁을 먹은 사서들이 숙소에 도착했다. 자리에 누운 채 그들을 맞이하는 나를 보며 누군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상태를 물어 왔고, 누군가는 식당에 오지 않은 게 차라리 나았다고도 말했다. 밥을 먹고 나서는 갑자기 게임을 하고 노래도 부르는 이상한 회식 분위기가 이어졌다고 했다. 몇몇은 술에 취한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고. 우리는 다 같이 둘러앉아 서로의 얼굴을 보며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진 않았지만, 간단한 질문을 주고받거나 각자의 처지를 짧게 털어놓았던 것 같다. 서로 어느 도서관 사서인지, 어떤 일을 하는지, 사서 누구를 아는지 모르는지를 물었다. 어느 대학의 문헌정보학과 출신 사서는 웬만한 선후배와 동기가 다 공공도서관에 몸담고 있어서 서로의 사정을 대충 안다고도 했다. 그 안에서도 나는 별 공통점을 찾을 수가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때 같은 숙소를 썼던 사서들의 얼굴과 이름은 다 까먹었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좀 더 길었다면, 더 많은, 더 깊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다음날 점심을 먹고 갔던 곳이 바로 문경새재도립공원이었다. 어린 시절에 수학여행으로 다녀온 기억만 어렴풋이 있는 곳. 하긴 나처럼 내성적인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게 그런 단체여행이니 내 기억 저장고 안에서도 가장 아래, 아주 납작한 채로 남아 있을 장소였다. 거길 서른이 훌쩍 넘어서 다시 가본 것이다. 놀랍지 않은 일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인솔하는 사람 없이 자유롭게 한 바퀴 도는 거였는데, 대부분 같은 도서관 사서끼리 모여 다녔다. 무리 지어 걷다가 서로의 사진을 찍거나 찍어주거나 같이 찍었다. 나는 그들에게서는 벗어나 있지만 전체 안에서는 크게 멀어지지 않도록 간격을 유지하며(나를 두고 다들 먼저 버스 타고 가는 일이 없도록) 5.3제곱킬로미터 면적의 공원을 혼자 걸었다. 이게 진짜로 혼자 걷는 것과의 결정적인 차이였다. 이런 식의 혼자 걷기는 끊임없이 주변을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사실상 진짜로 혼자 걷는 게 아니었고, 진짜로 혼자 걷는 것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자유로운가를 생각하면 비교 대상에도 낄 수 없었다. 그저 어서 이 일정이 끝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이 글은 ‘24절기마다 일기를 써야지’라고 마음먹었던 작년 이맘때 처음 쓴 글이다. 연재는 ‘동지’부터 시작했지만 사실은 ‘대설’을 먼저 썼던 거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기도 했고, 도서관 얘기 좀 그만하고 싶어서 일단 보류해두었다. 그 후로 1년이 지나 다시 대설이 찾아왔고, 이 글을 다시 보니 역시 이보다 더한 기억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보내기로 했다. 대설에, 이 기억이 전부라니! 하지만 희한하게도 나쁜 기억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조금 외롭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화 상대가 간절히 필요했던 시간도 아니었다. 딱히 하고 싶은 말도 없었고. 눈에 띄진 않았지만 어쩌면 나 아닌 누군가도 혼자서 그렇게 걷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때 그랬던 시간이 아직 기억에 남아서 ‘대설’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되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게 혼자인 듯 아닌 듯 어설프게 걸을 일이 아마도 다신 없을 테니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기도 하고. 언젠가 문경새재에 다시 가게 된다면 그땐 제대로 자유롭게 걸어볼 생각이다. 다른 기억을 다 지우고 장소만을 떠올리면 그곳은 충분히 멋진 공원이다. 그땐 헐벗고 눈 덮인 겨울이었지만, 혼자인 것을 의식하느라 진짜 혼자가 되지도 못했지만, 따뜻한 계절에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     



부산에 온 지 사흘째다. 대설이 무색하게 여긴 지금 봄이다. 두꺼운 겉옷은 이미 벗어던졌고 가지고 온 옷 중에 가장 얇은 니트 한 장 걸쳐입었는데도 따뜻하고 가뿐하다. 해운대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노트북을 펼치고 앉아 매일 이런 곳에서 글을 쓰면 잘 써질까 아닐까 서울에서 쓰는 글이랑 뭔가 달라질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 카페는 커피가 한 잔에 만 원이라 좀 무리일 듯 싶)다. 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볕을 잔뜩 받으며 광합성의 기운으로 글을 쓰고 있으니 아깝진 않다. 테이블마다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이 빛을 받아 환하다. 표정은 온화하다. 다른 세상 사람들 같다. 나도 잠시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봐야지. 그건 그렇고...


그동안 ‘24절기가 모자라’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년 동지부터 시작했으니 이번 대설을 마지막으로 스물네 절기를 채웠네요. 혼자 시작한 연재일 뿐인데 마지막은 왜 헤어지는 기분일까요. 항상 언제나 꼭 그렇더라고요. 슬프게. 절기마다 제 글을 보고 싶은 이 한 명이라도 계시다면 다음을 기약해보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한 연말 보내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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