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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맘 Jan 15. 2024

버티는 육아의 힘

육아에 있어서 시간은 언제나 부모 편이라 참 다행입니다.

내가 처음으로 보았던 나름 육아 안내서는 고 이원숙 여사가 쓰신 "너의 꿈을 펼쳐라"였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5-6학년 무렵이었고, 독서광이었던 엄마 덕분에 우리 집에는 육아와 관련된 책들이 참 많이 있었다.  엄마를 닮은 나는 그때도 동화책들 보다는 엄마가 보는 각종 어른들의 책을 당당하게(?) 훔쳐보곤 했는데, 그중에 마침 이 책이 내 눈길을 끌었다. 고 이원숙 여사는 정트리오로 유명한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선생님의 어머님이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고 이원숙 여사는 대단히 시대를 앞서간 신여성이다. 당시에 장사를 하며 7남매를 키우시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단행하고 7남매 중 셋을 세계적인 음악가로 키워내셨다. 당시에도 놀랍다고 느꼈지만, 지금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되새겨 보면 정말 넘사벽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는 대단히 훌륭한 인물들의 어머님의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다수의 책으로 나왔고, 얼마 전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인 손웅정 씨가 쓰신 책도 출판된 것을 보면, 위인들의 탄생, 그리고 성장을 이끈 부모님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너무나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책들을 많이 보다 보면, 살짝 우리 아이도 그렇게 키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엔 우리 아이가 '손흥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약간의 실망과 함께 큰 안도의 한숨을 쉰다. 우리 아이가 '손흥민'이라면, 그 아이를 결과적으로 '손흥민'으로 키우지 못했을 때 부모로서의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황송하게도 우리 아이들은 아직 9세, 6세, 1세에 불과하고, 아직도 이루어낸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기저기서 칭찬을 받고 질문을 받는다. 일단 아이를 셋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히 칭찬을 받고, 우리 아이들이 동네에서 걸어 다니고, 가끔 동네 정육점 사장님께 인사를 하며,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인사를 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이웃 주민들의 애정 어린 눈빛을 받는다.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이 변하긴 하지만, 아이가 귀해진 요즘은 내가 정트리오 선생님들이나 손흥민 선수의 부모님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 대단하게 봐주는 세상이 된 것이다. 가끔 나에게 누군가 "어떻게 그렇게 아이를 셋이나 키울 수 있나요?"라고 물어볼 때마다 조금은 머쓱해진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만으로도 내가 대단히 칭찬받을 일을 한 건가. 


아이들이 적어진 요즘 세상에서도 여전히 육아 트렌드는 부모의 인풋(Input)이 아이들의 아웃풋(Output)으로 나온다는 점을 대단히 강조한다. 엄마가 A를 해야 아이가 어떻게 된다는, 아빠가 B를 해줘야 아이가 어떻게 된다는 이런 육아 지침들이 난무한다. 나는 그 배경에는 부모들의 육아를 향한 열정을 해당 지침서나 기타 육아산업에 대한 소비로 이어지게 하려는 의도도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어릴 때 아빠가 책을 많이 읽어줘야 아이가 똑똑해지고, 엄마가 화를 안내야 아이가 자존감이 높아지며,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영어를 잘한다는 등 마치 아이라는 작품이 부모의 행동으로 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를 조성한다. 아이를 셋 키우는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깨가 무거워지는데, 하물며 아이를 낳고 키운 경험이 없는 젊은 친구들이 이런 지침을 모두 따르는 것이 육아라고 오해라도 한다면 얼마나 육아를 어렵고 버겁게 생각할까 싶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데 부모의 노력이 전혀 안 든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내가 아이를 셋이나 낳고도, 누군가에게 무조건 아이를 낳아라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은 아이를 하나하나 낳아서 키우는데 많은 수고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아와 결혼생활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마도 이미 상대의 인격체는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모가 어떻게 하면 착하게 크고, 어떻게 하면 똑똑하게 클 것이라고 착각하는 반면, 실상은 그렇지 않다. 결혼생활에 빗대어 생각해 보더라도 나와 결혼한 이후에 남편이 지난 2-30년간 살아온 생활방식과 성격을 버리고 전혀 다르게 변화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적으로 알고 있지 않은가. 


아이는 키우면 키울수록 자신이 이미 가지고 태어난 기질과 성격을 또렷이 드러낸다. 다시 말해 내가 요리를 잘한다고 잘 먹는 아이가 되거나, 소박한 밥상을 차린다고 잘 안 먹는 아이가 되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밥은 잘 챙겨준다). 외부 요소에 대한 경계심이 있는 아이들은 먹는 것에 있어서도 다소 조심성을 발휘하고, 경계심이 적은 아이들은 좀 더 편하게 다양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여기에 특정 음식에 대한 취향차이도 있고 그마저도 크면 먹는 음식들이 거의 비슷비슷해진다). 내 경우 첫 아이는 조금 예민했고 예민한 만큼 섬세했으며, 둘째는 대범하고 대범한 만큼 자존심이 쌨다.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이 대해도 결과가 달랐다. 그러다 보니 아이마다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구슬려 키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 나에게 어떻게 아이를 셋을 낳았냐고 묻는다면, 이는 전적으로 나의 취향인 것 같다. 가족들과 맞대고 비비고 살아가는 삶이 좋았던 나는 내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싶었고 내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 한계가 셋이었다. 그리고 아직 우리 아이들이 대단히 훌륭한 인물이 되지 않은 다소 이른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아이 셋을 키우는지를 묻는 다면, 나는 그냥 버틴다고 말할 것이다. 특히 워킹맘으로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아이들을 키우기가 매우 어렵고, 이로 인해 양가 부모님과 이모님의 도움을 산발적으로 받으면서 하루하루 버틴다. 그리고 그 버티는 과정에서 소록소록 자라나는 아이들의 모습과 점점 늘어나는 아이들의 능력은 고스란히 아이들의 공으로 돌리고 칭찬한다. 어느새 한글을 익히는 것도, 구구단을 외는 것도 그 아이들의 노력이자 성과이다. 


이렇게 하루하루 버티는 육아 가능한 것은, 육아에 있어서는 시간은 내 편이기 때문이다. 아이가 커갈수록 나의 노력은 적게 들어간다. 신생아 시절 100%의 힘을 다해 버텼다면,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는 70% 정도로 버틸 수 있고, 유치원에 가면 아이들의 인생에서 부모의 몫은 50% 남짓 남는다. 초등학교에 가고 나서는 그야말로 3-40%의 노력만으로도 아이의 일상은 돌아간다. 물론 아이를 내가 만들어가지 않고,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버티는 육아를 할 때의 이야기이다. 만약 내가 아이들에게 뭔가 목적을 갖고 "최고의 아이"로 만들어내고자 했다면, 매 시기에 100%의 힘과 노력을 다해야 했을 것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이가 과연 최고의 아이가 될 수 있는지는 아이의 기질과 성격에 달려있다). 하지만 나는 그 노력은 내 인생에 쏟고, 아이들의 인생은 아이들이 주도할 수 있게 내버려 두기를 택했다.    


그렇게 아이를 키워서, 당신의 아이가 어떻게 자라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머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첫째 아이가 7세 여름까지 한글을 더듬거리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주변의 우려를 사기도 했었다. 하지만 육아 10년 차에 들어가는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주변 분들의 살뜰한 도움으로 단 한순간도 아이들을 방치하지 않았고, 우리 아이들은 나이에 맞게, 건강하고 밝게, 주체적으로 하루하루 잘 자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나는 일이 있으면 마음껏 부모에게 자랑하고, 원하는 게 있으면 지칠 만큼 조르기도 하며, 자존심이 상하거나 화가 나면 울음을 터뜨리면서 말이다. 


조금은 야몰 차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는 버틸 뿐이고, 나머지는 아이 몫이다. 부모의 역할은, 초년에는 아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나갈 수 있는 행동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주지만, 점점 아이들이 자라날수록 아이가 스스로 선택하는 행동과 그 결과를 함께 고민하고 조언해 주는 역할에 머물러야 한다. 나는 그런 육아를 택했고, 시간은 나의 육아 부담을 점점 더 줄여줄 것을 알고 있다. 그랬기 때문에, 둘째가 조만간 학교에 들어가면서 조금 편안해질 것이 예상되던 즈음에, 다시 셋째를 낳음으로써 그나마 생길 여유를 기쁘게(?) 반납했는지도 모르겠다. 


주말 내 육아에 시달리다 도망치듯 일터로 뛰쳐나온 월요일이라면,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뇌어보는 건 어떨까. 육아에 있어 시간은 언제나 부모 편이다. 버티기만 해도 육아는 무조건 더 나아지고 쉬어지는 게임이다. 아주 쉽지 않은가. 그리고 끝이 있음을 인식하는 순간, 지금을 더 소중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이따 퇴근하면 내일이면 보일 듯 안보일 듯 또 어딘가 자라나서 없어질 "오늘의"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한 번 더 안아주고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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