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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스트옙스키 Jun 20. 2021

언택트 사이의 콘택터


 요즘 사람들에게 b.c, a.c는 더 이상 기원전과 기원후를 의미하지 않는다. 비포 코로나, 애프터 코로나라는 의미로써 팬데믹 전과는 너무나도 달라진 사회와 생활 양식을 유머스럽게 이르는 단어로 작용하고 있다. 과연 이젠 마스크 없이 거리를 활보하던 시간들이 전생마냥 흐릿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마스크가 있다고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필요한 최소 동선 안에서만 움직이며 어딜 가던 그 족적에 인증까지 받아야 한다. 처음엔 불편하기만 했던 이 모든 것들이 어느새 우리의 삶에 필수 기본 요소로 자연스럽게 배어들고 있다. 이제 우리는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없다, 이 문장에 뼈저리게 공감하게 된다. 2년 남짓의 시간동안 우리가 얼마나 많이 바뀌어야만 했는가.

 더 이상 방콕족들과 혼밥족들은 사회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이자 덕목, 나아가 보편 생활양식으로 변모했다. 우리 모두 혼자, 혹은 가족이나 동거인과 집에만 틀어박혀 있다. 등교와 출근까지 비대면으로 전환되었는데, 취미와 여가는 오죽할까. 직접 가서 체험해야 하는 부류의 업장은 줄줄이 문을 닫고 있다. 사람들이 집에 갇힘과 동시에 취미와 여가도 사람들을 따라 집안으로 들어가버렸기 때문이다. 홈카페, 홈트, 홈베이킹, 모든 단어들 앞에 붙은 '홈'이 우리가 집안에 틀어박혀서도 재미있게 놀고자 꾸역꾸역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눈물의 D.I.Y 정신 부활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현대인들의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욕구'가 빚어낸 슬프고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내가 가는 대신 경험의 필요 요소들이 집으로 오게 하는 생활 양식이 그 어느때보다 활성화 되고 있다. 쿠팡의 새벽배송, 마켓컬리의 샛별배송과 같이 주문하면 해 뜨기도 전에 식품 생필품이 집 앞으로 배달되며, 그 외의 공산품 또한 택배 트럭을 타고 총알처럼 우리에게 배송된다. 음식은 어떠한가. 최고 호황을 맞고 있을 배달음식 플랫폼들을 생각해보자. 주문을 남기면 조리 여부, 배송 시간, 예상 도착 시간까지 화면을 통해 명료한 숫자로 받아볼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문을 열고 그 앞에 놓인 상품과 식품을 받아 보면 그만이다. 받은 후 만족했다면 리뷰에 별점 다섯 개를 남겨주면 더욱 마음이 뿌듯해지고 말이다.

 당연히 우린 알고 있다. 우리가 주문한 모든 것이 발이 달려 스스로 우리 현관까지 걸어오진 않는다는 것을. 배달업 종사자들의 손이 약속된 시간까지 우리에게 닿아온다는 것을 안다. 직접 가서 구해오는 것보다 배달로 받는 것이 더 보편적인 지금, 그들은 이 사회에서 제일 필수불가결한 인원들이 되었다. 언택트 시대 유일한 콘택터가 된 것이다.


대책없는 물량감축 강요하는 사회적 합의안 규탄 기자회견, 사진=연합뉴스.


 지금 이 중요한 콘택터들이 업장을 나왔다. 기자회견에서 그들이 사용한 문구를 보자. 과로사 방지를 위한 사회적 합의가 택배노동자의 생계를 위협해서는 안됩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 최근 뉴스 보도를 통해 또 한 사람의 택배노동자가 극심한 과로 끝에 쓰러졌다는 사실이 세상에 전해졌다. 그가 스스로를 태워가며 지급받은 급여는 최저시급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 고작 그 금액을 얻기 위해 그가 한계를 넘는 과로를 해야만 했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분노케 했다. 진정 말이나 되는 일인가. 21세기에 이런 일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는 것인가? 이것은 어딜 봐도 정상적인 노동의 구조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의 삶과 생계를 쥐고 우롱한 명백한 착취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안이 모색되었으나, 그 안에서 나온 사회적 합의 역시 질타를 받고 있다. 사진 속 택배노동자들이 들고 있는 슬로건에 쓰여 있듯, 대책조차 없이 물량 감축을 내세웠던 것이다. 택배노동자들이 지금까지 받아온 급여는 착취 과정에서의 산물이었다. 그들이 건강을 해하면서까지 과로를 해야만 그 금액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지급된 급여가 수많은 택배노동자들과 그들 가정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물량 감축이 일어나게 되면 물론 표면적 과로야 해결될 것이다. 물량이 준 만큼 택배노동자들의 급여 또한 줄어들게 될 것이다. 수행하는 업무 강도에 비해 모자란 급여를 받는 이들이 과로를 통해 채웠던 부분들은 사라지는 것이다. 결국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택배노동자들은 필요한 금전의 양만큼 또다른 노동업장을 찾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과로가 나아지는 게 아니라 더 극심해질수도 있는 일이다. 생계를 챙기려면 건강을 깎아가며 과로를 해야하고, 과로를 피하다가는 생계가 위협받는다. 기형적이다 못해 괴기스러운 구조다. 우리의 택배 상자가 어떻게 우리에게로 오는가. 누가 상품과 우리를 연결하는가. 모두 이들이다. 시대의 콘택터들이다. 택배 노동자들이다. 우리의 언택트 라이프를 지탱하는 콘택터들이 21세기에 생계유지에 대한 권리를 달라고 외쳐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왜 편의에 대한 정당한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단 말인가. 시장과 사회가 콘택터들에게 도둑질을 하고 있다. 정당한 급여를 받으며 생명권을 지킬 그들의 권리를 도둑질했다는 것이다.


 택배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생각없이 이 불편에 대해 투덜거리는 이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와 반대로, 이 파업을 응원하는 목소리 또한 들려온다.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과연 이것이 찬성, 반대, 응원하고 말고의 문제인가. 이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것들을 도둑질 당했다. 한 번이라도 택배 서비스를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면 응원이 아닌 반성의 태도를 보여야 할 것이다. 우리의 외면에 대해서, 무지함에 대해서.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물과 세상, 세상과 세상을 이어주는 이들의 목소리에, 콘택터들의 목소리에 집중하라. 우리의 언택트 라이프는 이들이 완성했음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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