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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련 Jun 20. 2019

편견

-    이육사 『파초』

  한 학기 동안 시에 관한 국문과 전공 수업을 들었다. 사실 수강신청을 마지막까지 망설였다. 타과 전공 수업을 듣는 건 처음이고, 괜히 흥미로 접근했다가 크게 피 보는 건 아닐지 고민도 됐으니까. 그래도 지긋지긋한 시 분석이나 지루한 암기는 아닐 거 같아 듣기로 했다.


  수업을 들으며 가장 깊이 생각했던 부분은 '편견'이다. 먼저 내겐 문학 전공자들에 대한 순진한 동경이 있었다. 문학을 배우고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문학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니...! 그 자체로도 너무 멋있어 보였고 품격 있어 보였다. 나도 그 낭만을 쫓고 싶어 동네 독서 모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독서 모임에서는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럴 때마다 각자가 느낀 감정, 해석한 방법을 듣고 '호오... 닝겐들이란 역시 재밌어, 재밌어.'하며 멤버들과 재미진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이 전공 수업은 달랐다. 첫 수업, 첫 발표날에 난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전공자들이기에 편견에 더 강하게 접착되어있을 수 있겠다는 걸. 물론 나는 국문과 전공생들보다 문학이나 작가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또한 전공생들이 어떤 전공 교육을 받아왔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지나치게 학습되어졌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지나친 학습'이라 말한 건 그들이 작품을 읽을 때 방법을 정해두고 그 영역 안에서만 분석하는 방식에 훈련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어 하나에 작가의 생애을 가져오고, 시어 하나에 시대를 져오는 건 교과서에 했던 거라 대학 전공생은 좀 다를 줄 알았는데! 물론 일반화를 하거나, 이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다. 어쩌면 '문학 전공생들은 더 자유롭고 독특한 해석을 내놓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나도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니까. 어쨌든 그들의 해석은 대부분 교과서에서 배운 해석, 작가의 생애, 시대적 배경 등이었다. 이젠 내겐 너무 질리다시피한 단어들이지만 어쩌면 그들에겐 당연하거나 더욱 중요한 의미들일 수 있겠다.


  이육사의 파초는 이런 나의 편견을 깬 작품이다. 이 수업을 함께 하며 내가 가졌던 강박은, '난 작품을 이상하게 읽는 건가?'였다. 다른 이들처럼 시어 하나에 얽매이거나 작가의 생애는 그닥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육사의 작품을 다루며, 조국의 해방 등으로 점철되어지는 그의 작품 해석법을 벗어나보는 것도 좋다는 수업을 듣고 나서는 그 강박을 벗어 던질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쓰면서 그렇게까지 의미를 숨겨두진 않았을 거 같은데...' 생각하는 일이 많았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육사의 파초 해석을 뒤져보았다. 역시나였다. 어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파초를 들며, 이육사는 개인적인 일을 시대와 국가의 일로 확장시키는 사람이란다. 그냥 그 구절 읽고 닫아버렸다. 아무리 수십 년 동안 공부하고 높고 높으신 박사라지만, 그냥 난 내 식대로 '내 경험'과 '내 느낌'에 의해 작품을 향유하기로 했다.


  난 파초를 읽으며 이육사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냄으로써 오는 감정을 꾹꾹 눌러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의 숨결을 바다의 달에 비유하고 별자리와 꽃을 보고 잊었던 계절을 떠올림이, 누군가를 열렬히 가슴에 담아두고 있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일까 싶어서이다. 또, 천년 뒤 가을밤에 빗소리를 세어본다는 건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 아닐까? 결국 헤어져 이룰 수 없지만 말이다. 그리고 결국 긴 시간 비를 세다가, 끝없이 헤어지자는 건 이별하는 인연임을 받아들이자는 의미로 느껴진다.


음. 역시 내 멋대로 해석하니까 속이 시원하군. 결국 이 생각의 끝에 다다르는 건, '각자의 편견에 충실하자'는 것이다. 경험과 느낌에 의존하는 나의 해석도 어쩌면 누군가에겐 편견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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