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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약 Dec 14. 2019

'큰 일' 내는 사람들의 손목시계

시계와 목숨값



나는 평소 시계를 잘 차고 다니지 않는다. 핸드폰 액정에는 늘 시간이 떠 있고, 사무실에 걸린 큼지막한 벽시계만으로도 시간 확인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 게다가 나는 몸에 무언가를 주렁주렁 걸치면 몸이 죄이고 무거워지는 것 같아, 손목시계를 차고 나와서도 중요한 일을 마치고 나면 재킷이나 가방에 넣어두곤 한다.


문제는 중요한 일이다.


나는 손목시계를 세 개나 가지고 있다. 검은색 시계는 '막시계'라 부른다. 현장에 나가 직접 발로 뛰며 상황을 점검하고 기록할 때 이 시계를 찬다. 막 이리저리 좌충우돌하다 몇 시야 지금 하면서 헐레벌떡 볼 때 제격인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실 떨어져서 망가져도 크게 아쉬울 게 없는 '막노동 시계'다.




나머지 두 개의 시계는 '행사용' 시계다. 가운데 시계는 내가 직접 샀다. 모든 게 다 수동이다. 날짜도 달이 바뀌면 일일이 돌려 맞춰 주어여 한다. 손목을 감싸는 끈이 따듯한 천 재질로 되어 있어 지금과 같은 겨울에 차기 좋다.


나머지 하나는 아내가 선물해 준 스틸 시계다. 세 가지 시계 중 가장 묵직하다. 시계알도 가장 크고 시원시원하고 스틸이라 땀이 많이 나는 여름에 차기 좋다.


이 두 시계는 주로 기관장을 모시고 진행하는 아주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차고 나간다. 특히 내가 행사의 사회를 맡았을 때 더더욱 그렇다. 그런 날엔 면도날을 바꿔 깔끔하게 얼굴을 비워내고, 말끔한 칼정장에 곱게 닦은 구두를 신고 허리에는 고급 가죽 벨트를 착용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왼쪽 손목에 똑떨어지게 시계를 묶는다. 시계들은 의전의 마침표이다.



올해는 삼일운동 및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대한민국의 얼과 국토를 지키기 위해 희생하신 선조들께서 남긴 수많은 역사의 시간들이 지금도 우리 곁을 공전하고 있다. 여기에도 시계가 등장한다.


제 시간은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거사 당일 김구 선생과 아침 식사를 나누던 중, 느닷없이 자신이 가진 회중시계를 풀어 김구 선생에게 시계를 바꾸어 차자고 제안한다.


이 시계는 선서식 후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의 시계는 2원짜리이니 내 것과 바꿉시다.


김구 선생이 이유를 물으니 윤봉길 의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나는 시계를 한 시간밖에 쓸 데가 없습니다.


김구 선생은 그 회중시계를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윤봉길 의사는 단순히 시계를 준 것이 아니라 목숨값을 맡긴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한 청년의 목숨값으로 일제의 만행이 전 세계에 폭로되고, 중국의 장제스는 백만의 중국인도 해내지 못한 일을 단 한 사람의 대한건아가 이루어냈다며 그때부터 대한민국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게 된다. 두 사람이 맞바꾼 회중시계는 훗날 대한민국의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국민의 목숨값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백범 선생이 받은 회중시계(왼쪽), 윤봉길 의사가 받은 회중시계(오른쪽)


나랏일 하는 사람이 좋은 시계 차고 가야지!


문화재 분야에서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 최대의 부호였던 그는 일제로부터 수탈되고 방치되는 우리의 문화재를 사들이고 보존하는데 전 가산을 바쳐 일평생을 보냈다.


그는 문화재 보존뿐만 아니라 그 가치를 대외에 널리 알리는데 주력할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도 힘썼다. 그 수제자가 바로 혜곡 최순우 선생(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1961년, 혜곡 선생이 한국미술 유럽 순방 전시회를 위해 공항 길로 나서는 차에 간송 선생이 함께 택시에 동승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간송이 혜곡에게 차고 있는 시계를 달라고 하여 내어 주니 간송이 자신이 차고 있던 고급 시계를 혜곡에게 채워주고 혜곡의 시계를 자신이 차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랏일 하러 가는 사람이 좋은 시계 차고 가야지!


혜곡 선생은 감격에 겨워 유럽에 가서도 그 보답을 무엇으로 할까 하루하루 고민의 시간을 보내던 중 이듬해 이국의 땅에서 뜻밖의 소식을 전보로 접한다.


간송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혜곡은 간송을 위해 그간 모아두었던 이국의 수석들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했다. 혜곡에게 채워준 간송의 시계는  한국 문화재의 보존과 계승의 임무를 부탁하는 마지막 작별의 상징이었다. 성북동에 위치한 간송이 지은 보화각과 혜곡이 머물던 옛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다.


[나는 내 것이 아른답다], 최순우 저, 학고재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어 있는 지금도 손목시계의 위력은 여전하다. 세계를 놀라게 했던 한국의 영화 「신세계」에서도 손목시계가 갖는 의미는 깊고, 또 아프다.


내 책상 서랍에 니 선물 있다. 난중에 풀어봐.


 

극 중 화교 세력의 보스 정청(황정민)이 자신의 오른팔인 이자성(이정재)이 첩보경찰임을 알고서도 끝내 제거하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며 동생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이제 그만 선택해라. 그래야 니가 살어.


경찰과 조폭의 신분을 오고 가던 이자성은 무엇이 정의구현인지 구분하는 것이 이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형이 남긴 짝퉁 선물 시계를 오른손에 찬다. 결국 그는 프락치 인생을 마감하고 형이 걸어온 그 길을 택하는 것으로 갈피를 잡는다. 형의 목숨으로 내가 대신 산다는 각오로.


내가 초선에 차던 건데 자네가 차.


영화 「특별시민」의 대사이다. 변종구 서울시 후보(최민식) 참모격인 박경희(심은경)에게 후보 단일화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박경희가 대선까지 생각한다면 단일화를 해선 안된다는 충언을 하자 변종구는 자신이 국회의원 초선 당시 차던 시계를 손목에서 풀어 박경희에게 넘겨준다. 정치 파트너를 넘어 생사를 함께하는 동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박경희가 선거를 코 앞에 두고 변종구의 범죄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 시계는 다시 변종구의 책상에 반납된다. 더러운 정치의 이면을 본 새로운 정치의 미래인재가 생사를 나눌 사이를 과감히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특별시민」 중


우린 같은 시간 속에 있어.
아빤 반드시 돌아올 거야.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떠나지 말라는 딸(차스테인, 포이)의 부탁에 아빠(매커너히) 손목시계를 함께 보며 이렇게 대답한다. 우주여행 중 블랙홀 속으로 들어간 쿠퍼는 시공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되고 딸에게 이진법을 통해 집안에 놓여 있는 손목시계에 해결책을 심는다. 이를 알아챈 딸은 인류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고 '임종에 이른 할머니 딸'과 아빠로 재회한다. 여전히 딸은 손목시계를 차고 있다. 여기서 시계는 인류를 구하는 핵심적인 매개체가 되어준다. 인류의 목숨값인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 중


당신의 손목시계는 지금 어디 있는가. 누구에게 선물 받았나. 또 누구에게 선물해 줄 것인가. 다음엔 어떤 시계를 살 것인가. 그 시계를 찰 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손목시계가 던지는 그 질문에 당신의 삶이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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