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으로 충만한 세상 #3

by 이룸

“그만하자. 나이 마흔이 넘어서 결혼도 못하고 살아가는 루저loser들끼리 얘기해 봐야 도토리 키 재기지.”


B가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그런 B의 태도에 S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소리쳤다.


“그만하긴 뭘 그만해! 누가 먼저 시작한 건데! 아니, 실컷 신경 건드리고 헤집어놓은 게 누군데 그래?”


“아이,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B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짜증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S는 여전히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이제 술을 더 마시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루저는 누가 루저라는 거야! 너 스스로 루저라고 생각하면 됐지, 왜 나까지 끌어들여, 끌어들이긴! 난 아직 인연을 못 만났을 뿐이야.”


“가진 건 쥐뿔도 없으면서 눈만 높으니까 그렇지.”


“지금 누구 얘길 하는 거야? 그건 네 얘기잖아!” S는 어이없어하며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가 다시 되돌렸다. “난 적어도 너처럼 사업에 망해서 빚에 허덕이며 살진 않아!”


“아이 썅!” B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자꾸 지난 얘기를 끄집어 내!”


“지난 얘기는 뭐가 지난 얘기야, 현재진행형이면서!”


“그래도 나이 40이 넘어서 부모에게 얹혀사는 것보단 낫잖아!”


“얹혀살긴 누가 얹혀산다는 건데! 난 가업을 물려받는 거라고!”


“흥, 가업 좋아하시네.”


B가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이죽거리며 맥주를 들이켰다. S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B를 노려보았다. 그때 다른 손님들 얘기를 들어주고 있던 마담이 B와 S의 자리로 다가왔다.


“왜 친구끼리 싸우고 그래!”


“저런 새끼가 친구는 무슨…….”


B가 혼잣말하듯 웅얼거렸다.


“뭐? 새끼?”


S가 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 참, 왜 자꾸 그래!”


마담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만하자, 그만. 왜 자꾸 흥분하고 그래!”


B가 S를 올려다보며 성가시다는 듯 내뱉었다.


“아…….” S는 허리에 양손을 올리곤 천장으로 시선을 향하며 한숨을 내쉬었다가 다시 고개를 내렸다. “차라리 칼로 여기를 찔러라!” S는 손으로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그러면 속이라도 시원하겠다. 실컷 놀리고 조롱하다가 그만하자라니…… 어우…….”


S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고 카드를 마담에게 내밀었다.


“아이 참, 사이좋게 지내더니 오늘 왜 이래!”


마담이 카드를 받아들고 카운터로 향하며 말했다.


B는 이제 더 이상 먹을 게 없어진 북어 조각들을 의미 없이 만지작거렸다. 미안하다고 사과할까 하는 생각이 가물거렸지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S 또한 마음이 착잡하기만 했다. 자주 만나서 외로움을 나누고 얘기를 주고받던 유일한 친구였는데, 이제 이 친구마저 만나지 않게 되면……. 가게의 빈 공간에 시선을 두면서 어떤 말로 사태를 수습할까 생각해 보았지만 적절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S는 카운터로 가서 카드와 영수증을 받아들었다.


“더 앉아 있다 가.”


마담이 다독이듯 말했다. 그러나 S는 아무 대꾸 없이 오른손을 들어보이곤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무슨 일로 그래?”


마담이 B에게로 와서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랬지? B는 대화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한없이 허전하기만 했다. 자질구레한 얘기를 하고 싶지도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니야.”


“별일 아니지?”


마담이 애써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또 올게.”


말하고 나서 B는 밖으로 향했다. 그러나 별일 아닌 게 아니라는 인식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십대 후반에 공무원시험 준비하면서 도서관에서 만났던 기억이 오랜만에 떠올랐다. 동선이 비슷해서 자주 마주쳤고, 서로 아는 체 하게 되었고, 밥도 함께 먹고 술도 마시게 되었다. 둘 다 합격하지 못했고, 언제부턴지 연락이 끊겼다. B는 식품가공업체에서 5년간 일했고, 모은 돈으로 식품유통업을 시작했다. 그때 식당에서 일하는 S를 다시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런대로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그러나 더 큰 돈을 벌고 싶었고, 더 폼 나는 인생을 살고 싶었다. 욕심을 부린 게 화근이었다. 식품가공업체를 설립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다. 돈을 벌기는커녕 빚만 잔뜩 짊어지게 되었다.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도 떠나갔고,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도 하나둘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도 꾸준히 만남을 유지해왔던 건 S가 유일무이했는데…… 이제 원룸에 틀어박혀서 텔레비전이나 보면서 혼자 술잔을 기울일 생각을 하니 마음이 한없이 착잡하기만 했다. 그놈의 자존심이 문제였다. 좀 듣기 싫은 소리를 들어도 허허, 하고 웃어넘기면 될 것을…… 그걸 못 참고 상대방을 공격하는 습성이라니. B는 밤거리가 더욱 어둡게만 느껴졌다.


마담은 시간을 확인하곤 리모컨으로 텔레비전 채널을 바꾸었다. 즐겨 보는 드라마의 마지막 회가 막 시작되고 있었다. K기업의 장남과 차남이 미모의 국숫집 딸을 두고 온갖 선물 공세로 쟁탈전을 벌였다. 그러나 그 딸은 국숫집의 단골손님인 찌질해 보이는 취업준비생에게 일편단심이었다. 여기까지가 지난 회까지의 줄거리였다. 마지막 회가 시작되자마자 취업준비생은 K기업의 라이벌인 Y기업 회장의 숨겨 놓은 아들임이 밝혀진다. 그리하여 취업준비생은 Y기업의 계열사를 거느리게 되고, 국숫집 딸과 결혼하게 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