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문득, 옷을 벗어볼까, 하는 생각이 바람결에 스쳤어요. 죽을 마음이었으면서 이 정도야 뭐, 어차피 이 시간에 숲을 찾아올 사람도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죠.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과 옷을 벗고 풀 위를 걸어보았죠. 그랬더니 정말 홀가분하더라고요. 왜 진즉 이런 생각을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 정도였죠. 저 나무는 한 곳에 못박혀 있으면서도 저렇듯 자유로운데, 사람들은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면서도 왜 늘 무언가에 짓눌린 채 살아가는 걸까. 그래, 이제부터 난 저 나무처럼 살아갈 거야, 하고 다짐했죠. 그리고 미안했어요, 나무에.
그런 채로 그곳에서 잠이 들었고, 아침에 숲을 빠져나왔어요. 이제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자유롭게 살아가자, 마음먹었죠. 결혼을 하겠다는 마음도, 위대한 작가가 되겠다는 마음도, 그 어떤 마음도 다 비우고 살아가자고.
그러나 그게 어디 마음만 먹는다고 될 일인가요?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그동안 있었던 돈은 다 떨어진 상태고, 월세니 공과금이니 하는 것들을 내려면 일자리를 구해야 했지요. 그러나 비서 같은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어요.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가 출판사에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외계인이 될 순 없지만 외계인들의 자취를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서였죠. 그래서 몇 군데 출판사에 이력서를 넣었고, 소규모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어요.
그러나 처음 들어간 곳은 지구인들의 출판이 주가 되는 곳이라서 재미가 적었어요.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자비로 출간하는 것이 주가 되는 곳이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욕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직장을 옮기게 된 거예요, 세계문학전집을 출판하는 곳으로. 그렇게 해서 경민 씨를 만나게 된 거죠.
직장에서 일할 땐 직장에서 요구하는 대로 죽은 듯이 일만 했어요. 그래서 일을 끝내고 집에 오면 서둘러 옷을 벗어던져야 했죠. 갑갑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해도 가끔씩 견딜 수 없어지는 때가 오게 마련이죠. 그럴 땐 숲에 갔어요. 사람들이 오지 않는 밤이나,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는 낮에 혼자 숲에 있으면 갑갑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훌훌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희열이 찾아왔어요. 날씨가 추워지면 목욕탕에 갔어요. 답답한 공간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차선책이죠. 만약 돈이 많아진다면 시골에 집을 짓고, 정원에 넓은 목욕탕을 설치하고 싶어요. 버튼을 눌러 열고 닫을 수 있는 돔 형태의 천장을 마련하고…….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외계인의 세계에 푹 빠져 있는 게 보였어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죠. 제가 그랬으니까요. 겉은 잠잠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용암이 들끓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까……. 당신을 지켜주고 싶었어요, 당신 곁에서, 잠시만일지라도. 그래서 회식하던 날, 당신이 내 옆에 앉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루 종일 주문을 외우듯이 했어요. 그랬더니 정말로 그렇게 되더군요. 확실히 비슷한 사람끼리는 서로를 끌어당기는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마음에 당신을 향한 사랑의 감정이 싹트게 되었고, 그러자 두려워졌어요. 사랑의 감정이 더 자라기 전에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앞서 말했듯, 난 애도 가질 수 없고, 그것보다도 일반적이랄까 정상적이랄까…… 그런 생활이 불가능해요. 안 그러고 싶지만…… 이미 그렇게 되어 버렸어요. 게다가 이제 날이 쌀쌀해지면 우울한 기간이 더 길어질 거예요. 그럼 당신을 더 힘들게 하게 되겠죠.
난 이제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날 거예요. 늘 여름인 나라로.
그동안 고마웠어요. 잘 지내기를…….
편지를 다 읽고 나서 행거를 보니 그녀의 옷들이 없었다.
화장품도, 신발도, 가방도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그녀의 삶의 방식에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출 수 있겠다 싶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리다니……. 휴대폰을 꺼내어 버튼을 눌러보았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응답이 돌아왔다. 왜 꼭 이래야 한단 말인가. 머리에서 현기증이 일었다. 그와 함께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청춘은 끝났다’는 조용필의 노래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러자 뭐라고 규정짓기 힘든 종류의 슬픔이 가슴 가득히 차올랐고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발가벗은 채 운 것은 어린 시절 이후로 처음이었으리라, 아마도.
그녀는 또 하나의 카프카였다. 하긴, 이 세상에 내가 모르는 세계, 아무리 노력해도 가 닿을 수 없는 세계는 얼마나 많은가. 그런 채로 우리는 살아가지 않던가.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살아가지 않던가. 그런데도 큰 문제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 자체가 불가해하게 느껴졌다. 예민하지 않으면 되는 걸까. 예민함이야말로 평범한 삶의 길을 방해하는 걸까. 그녀는 너무 예민해서 탈이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예민하게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갑자기 수더분해질 수도 없지 않은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사정없이 뒤엉켰고, 그리하여 머리가 지끈지끈거리며 뜨거워졌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