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dflower 11

by 이룸

결혼한 남자는,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결혼을 하고 단둘이 밀폐된 공간에 있게 되자 달라졌어요. 나를 욕구충족의 수단으로 취급했어요. 그동안 억압된 것들을 온통 내 몸을 통해 보상받으려 하는 것 같아 보였죠. 오늘은 피곤하다고, 내키지 않는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어요. 나는 그러면 드러누운 채 시체처럼 놓여 있곤 했죠. 그러면 화를 내고 욕을 하면서 뺨을 때렸어요. 그러면 더 흥분이 되나 보더라고요. 그런 상태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도저히 낳을 수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를 지웠어요. 그 사실을 남자가 알게 되었고, 불같이 화를 내더니 내 배를 발로 찼어요. 하혈을 했고, 병원에 입원했고, 그리고 퇴원할 즈음엔 불임판정을 받았어요. 불임의 이유를 의사에게 물어보니, 원인을 알 수 없다더군요. 하지만 난 원인을 알고 있었죠. 폭력. 생각건대, 결혼한 남자는 아버지와 비슷한 사람이었어요.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했다는 건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감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이혼을 했고, 조그마한 방을 하나 구한 다음 오로지 책만 읽으며 지냈어요. 이제부턴 온전히 나만의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러면서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죠. 그래서 미친 듯이 글쓰기에 매달렸어요. 꼬박 5년을 그렇게 보냈어요. 그리고 쓴 글들을 여기저기 출판사에 보냈는데, 아무 연락도 없더군요. 작가들의 약력을 보면 어렵지 않게 작가의 길을 걷던데…… 성공한 사람들의 책만 접해 봐서인가 보구나, 싶더라고요.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책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했더라도 주목받지 못했을 테니까요.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재능은 역시 타고나는 것인가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노끈을 사서 핸드백에 넣고 버스를 탄 다음, 산이 보이는 도시 외곽에서 내렸어요. 그리고 한참을 걷다가 길이 보이자 그곳으로 들어갔죠.

소나무 우거진 속에 놓인 플라타너스 한 그루를 대면한 순간, 이 나무다, 싶었어요. 이 나무에 녹아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음 같아서는 땅을 파고 나무 아래로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고…… 주변에서 넓적한 돌을 몇 개 가져와 세우고, 그 위로 올라가 노끈을 가지에 걸쳐 묶고, 올가미를 만든 다음 목에 걸고, 툭, 발로 돌을 찼어요.

살아온 날들이 빠르게 역으로 흘러가더군요. 그러곤 어둠이 길게 이어지더니, 좁은 구멍이 저 멀리에 보였고, 소용돌이가 치더니 내 영혼이 그 구멍 속으로 쏘옥 빨려 들어갔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하얀 세상이 펼쳐졌어요. 아니, 하얗다기보다는 투명하다고 해야 할까? 어떤 무게도 없이 내 영혼이 떠다니고 있었어요. 다른 영혼들도 투명한 상태에서 형체만 분간할 수 있는 윤곽으로 떠다니고 있었죠. 아, 이게 영혼의 세계인가 보구나, 싶더라고요.

순간, 어머니를 떠올렸더니, 슬롯머신에서 그림이 휙휙 넘어가듯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스쳐지나가다가 어머니의 형체가 나타났어요. 그러곤 잠시 후 어떤 남자아이의 형체로 바뀌었어요. 아버지를 떠올렸더니, 또 그림이 휙휙 넘어가다가 아버지의 형체에서 깜박깜박하다가 여자아이로 변했어요. 퍼뜩 이해가 가더군요. 어머니는 남자아이로, 아버지는 여자아이로 새로이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을요. 아, 다음 생에서는 남녀의 역할을 바꾸어 살게 되는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음 생에서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될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지만 그것까지는 알 수 없었어요. 이번엔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려봤죠. 휙휙 그림이 넘어가더니 버지니아 울프가 나타났어요. 그러곤 외계 생명체의 형상으로 변하더군요. 외계인이 잠시 지구에 유배당한 거로구나, 싶더라고요. 모차르트를 떠올리고, 고흐를 떠올려 봐도 마찬가지였어요. 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결국 외계인이었구나, 그럼 그렇지, 하는 깨달음이 오더군요. 그럼, 난? 하고 떠올렸더니, 휙휙 그림이 흘러가다가 내 모습이 나타났고, 그 상태에서 계속 깜박깜박거리기만 하더라고요.

그런 채로 한참을 떠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목이 아파왔고, 투명한 세상이 깜깜해졌으며, 둔탁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어요. 그런 채로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왔어요. 난 그럼 새가 되는 건가? 생각하다가 눈이 간질간질해서 눈을 떴어요.

나는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누워 있었고, 어떤 할아버지가 옆에 앉아 눈앞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흰 머리에 흰 수염을 기른, 꼭 도인 같이 생긴 할아버지였어요. 내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앉자, 할아버지가 쯧쯧, 혀를 차더군요. 그러곤, 무슨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나이에 그러는 거 아니야, 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망태기 같은 걸 둘러메고 산 아래로 내려갔어요. 약초나 산삼을 캐러 다니는 분인가 보구나 싶었어요. 처음 뵌 분인데, 꼭 언젠가 보았다는, 아니 잘 알고 지냈던 사람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마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것 같아요.

나무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가 잘려나가 있었어요. 그 할아버지가 낫 같은 것으로 베었나 봐요.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떨어져나간 나뭇가지도 노끈도 돌들도 보이지 않았어요. 할아버지가 다 치웠나 보더라고요.

그때의 심정은 참담함 그 자체였어요. 아, 죽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보구나, 싶더군요. 그럼 이제 어떻게 하지? 그곳에 앉아 생각에 잠겼어요. 그러나 뾰족한 방안은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저 망연히 눈앞만 바라보고 있었죠. 그러다가 드러누워 플라타너스를 쳐다보았죠. 그러고 있자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기 시작했어요. 껍질을 벗어던진 나무줄기, 바람결에 살랑거리는 나뭇잎과 열매들, 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싱그러운 향기……. 아, 나도 저 나무처럼 홀가분해졌으면…….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지만, 난 그대로 누워 있었어요.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평화로움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평화로움을 흩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이렇게 평화로워도 되는 것인가, 의구심이 들 정도의 평화로움이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