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숲에서 돌아와 번갈아 샤워를 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제 비는 찔끔찔끔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했기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밥을 먹었다. 그래서인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금세 졸음이 몰려왔고, 먼저 자야겠다고 그녀에게 말한 뒤 소파로 향했다. 그랬더니 웬일로 그녀가 텔레비전의 리모컨을 누르고 내 손을 잡곤 침대로 나를 이끌었다. 내가 눕자 그녀도 한없이 사랑스러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옆에 누웠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흐뭇한 기분이 되어 눈을 감은 채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와 나는 발가벗은 채 드넓은 초원 위에 누워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맑고 깨끗한 하늘, 저 멀리엔 무지개까지 떠올랐다. 그것도 쌍무지개였다. 꽃향기 그윽한 초원 위를 나비들이 자유분방하게 날아다녔다. 나는 옆으로 돌아누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그윽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어느 순간, 그녀의 몸이 스르르 녹아드는가 싶더니, 그녀가 종이묶음으로 바뀌었다. 나는 종이를 넘기며 읽어보았다. 어마어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발가벗은 상태 그대로 달려가 그것을 출판사로 가져갔고, 출판사 사장이 떠들러보더니 놀라워했다. 그러더니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걸 정말로 자네가 썼다고? 나는 꺼림칙했지만 그렇다고 대답했다. 좋아, 좋아, 서둘러 출판하자고! 근데, 비법이 뭐야? 발가벗고 쓰면 됩니다. 내가 말하자마자 사장이 훌러덩 옷을 벗었고, 다른 직원들도 지체 없이 옷을 벗어던졌다. 책이 나오게 되었고, 신문에서 방송에서 연일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현 시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작품! 프란츠 카프카의 통찰력과 버지니아 울프의 섬세함이 만나다! 사람이 쓸 수 없는 작품, 고경민은 외계인임이 분명하다! 사장이 나에게 다가와, 나도 발가벗고 써 봤는데 나는 왜 안 되는 거야? 하고 머리를 긁적이며 투덜거렸다. 나도 마찬가지야! 다른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나는 씨익 웃음 지으며, 숲에 가서 교합을 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어떤 숲으로 가야 하느냐고 다들 아우성을 쳤다. 나는 책을 펼쳐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사장과 직원들이 책 속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전인지 오후인지 잠시 분간이 서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홉 시 이십 분이었다. 아, 아침인가 보군,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계산해 보니 열세 시간 넘게 잔 것이었다. 목과 어깨와 허리와 무릎 할 것 없이 온통 뻐근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스트레칭을 했다.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장대비 쏟아지는 속에서 거사를 치렀으니 몸 여기저기가 쑤실 만도 했다. 그럼, 그녀는? 욕실에 가보았지만, 없었다. 방문을 열어보았지만, 거기에도 보이지 않았다. 뭘 사러 밖에 나갔나? 커튼을 빼꼼히 열고 밖을 쳐다보았다. 언제 비가 내렸냐는 듯 화창한 날씨였다. 전날에 줄기차게 비가 내려서인지 무덥지는 않았다. 몸을 돌려 걷다 보니 소파에 하얀 종이가 놓여 있었다. A4용지 다섯 장이었다. 뒤집어 보니 파란색 볼펜으로 적은 글씨가 빼곡했다.
From 유리 To 경민
깊은 잠에 잠긴 당신을 보며 편지를 씁니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어릴 적 난 말수가 적은 아이였어요. 그렇지만 놀 때가 되면 활발하게 잘 놀았어요. 장난도 잘 쳤고요. 극과 극을 오가는 성격이었죠. 그래서 아이들한테서 ‘넌 좀 이상해.’ 라는 말을 자주 들었죠. 조용히 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활발해졌고, 한참 활발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조용해졌으니까요.
나에게 조용함을 물려준 것은 어머니였고, 쾌활함을 물려준 것은 아버지였어요.
아버지는 방송국 PD였는데, 텔레비전을 보면서, 내가 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며 자랑을 하시곤 했죠. 만들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어떻게 해서 어려움이나 실수를 이겨내고 완성할 수 있었는지……. 그럴 때마다 아버지가 자랑스러웠고 대단해 보였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다분히 가부장적이었어요.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야만 했죠. 그리고 남성중심적이었어요. 오빠들에게는 많은 투자를 했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여자는 현모양처가 되는 게 최고의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겼죠. 그래서 나는 항상 말이나 행동을 조심조심해야 했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이상형이었다고 했어요. 항상 가족을 위해 헌신적이었고, 아버지 말에 고분고분 따랐으며, 웃을 때도 입을 가리고 소녀처럼 수줍게 웃었으며, 특별한 일이 없을 땐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죠.
그러나 가끔씩 어머니는 침묵했어요. 아버지가 어떤 말을 해도 대꾸를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했어요. 자신의 생각과 다른데 아버지가 강요할 때 행하는 어머니의 유일한 저항방식이었죠. 그러면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졌고, 그러나 어머니는 시종일관 침묵을 유지했고, 울화통이 터진 아버지는 눈에 보이는 것을 집어던졌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한동안 드러누웠고, 아버지는 며칠 지나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했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죠. 그런 날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됐어요.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내 안에 들쭉날쭉한 성격을 자리 잡게 한 것 같아요. 아이들하고 지낼 때 침울하게 있다가도, 아니야, 난 아무렇지 않아, 라는 걸 내보이기 위해 일부러 쾌활하게 행동했으며, 한참 그러다보면,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다시 조용해진 것 같아요.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여자대학의 비서학과에 들어갔고, 졸업하자마자 기업체 사장의 비서가 되었어요. 그런 뒤에 아버지의 주선으로 아버지 회사의 후배 PD와 선을 보았고, 결혼했어요. 일은 그만두었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해에 아버지가 뇌출혈로, 다음해에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어요. 뭔가 조짐이 좋지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