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다 왔네.”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다른 때 오던 것에 비하면 서너 배의 시간이 족히 더 걸린 듯했다. 오른쪽으로 난 시멘트길로 접어들었다. 밤에 올 땐 몰랐는데, 길 오른편으로는 산이, 왼편으로는 도랑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시멘트길엔 물이 고여 있지 않았다. 흙탕물이 산에서 도랑으로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공터에 차를 주차하자마자 그녀가 원피스를 머리 위로 끌어올려 벗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나도 트레이닝 반바지와 셔츠, 그리고 샌들을 벗고 밖으로 나갔다. 차를 타기까지 십여 미터의 빗속을 걸은 것에 불과했지만, 이미 옷은 축축한 상태였다.
처음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억수 같은 비였다. 물이 흥건히 고인 흙길을 그녀가 앞서고, 내가 뒤따랐다. 소나무가 양옆으로 빼곡했고, 비에 젖은 나무와 풀에서 풍겨 나오는 향기들이 몸과 마음에 촉촉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옷과 신발을 모두 벗고 우산을 쓸 필요도 없이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자니 참으로 홀가분하고 상쾌했다.
조금 걷다가 그녀가 길을 벗어나 왼편으로 꺾어들었다. 밤에는 계속 앞을 향해 길을 걷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뭇잎들이 비를 먼저 맞아서 내려 보내기에 공터에서만큼의 비가 쏟아져 내리지는 않았다.
물기를 흠뻑 머금은 땅 위를 걷던 그녀가 어느 순간 멈춰 섰다. 잔디와 풀이 무질서하게 자라난 공간이 있었고, 하늘이 동그랗게 열렸다. 그리하여 다시금 빗줄기가 거침없이 몸 위로 내리꽂히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거닐며 둘러보았다. 플라타너스 한 그루가 보였다. 플라타너스는 소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압도적인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다. 온통 소나무가 밀집한 곳에서 플라타너스는 참으로 생뚱맞게 놓여 있었는데, 껍질을 벗어던진 나무줄기에 드러난 플라타너스 특유의 알록달록한 무늬가 비를 맞아서인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그리고 부러진 가지가 눈에 띄었다.
아, 이곳이었군, 하고 나는 속으로 읊조렸다. 이런 곳을 어떻게 발견했을까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원래는 무덤이 있던 자리였나 보군,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터의 가운데 부분에 약간 솟아오른 둔덕 형태가 남아 있었다. 이장을 하고 버려진 공간인 듯했다. 이곳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곳일까, 하는 의문이 일렁였다. 가족 중에서 누군가의 무덤이었을까? 설마 그런 곳에서 나와 관계를 가졌을까? 에이, 그건 아니겠지. 전에 사귀던 남자와 이곳에서……? 그 남자와의 추억이 서린 곳? 나는 그 남자의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는 걸까? 에이, 그것도 아니겠지? 나는 도리질하며 생각을 차단했다. 그러고 보니 여태껏 그녀에게 이곳의 의미를 물어보지 않았고, 그녀도 그것에 대해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심하기도 하여라, 내 마음이여…….
그녀가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비를 맞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한없이 왜소하고 연약한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그러자니 불현듯 Skylark의 ‘Wildflower’란 노래의 한 구절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Let her cry, for she is a lady.
Let her dream, for she is a child.
그녀를 울게 내버려 둬, 그녀는 숙녀니까.
그녀를 꿈꾸게 내버려 둬, 그녀는 어린아이니까.
그와 함께 초원 위에 조그맣게 피어난 한 떨기 야생화가 떠올랐다.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추었다.
눈을 감으니 드넓은 초원 위에 태초의 남녀가 마주선 영상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먼 과거에 행했던 일을 다시금 행하고 있는 듯한, 그리고 먼 미래에도 다시금 행하게 될 듯한 야릇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빗줄기가 계속해서 머리 위로 쏟아졌고, 입 안으로 흘러든 빗물이 키스의 달콤함을 더욱 감미롭게 했다.
그녀가 풀 위에 드러누웠고, 나는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발끝까지 입을 맞춘 다음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나를 꼬옥 껴안은 채 마음껏 울부짖었다. 그녀의 울부짖음은 천둥소리를 닮아 있었다. 온 세상을 찢어발길 듯한 그 소리 앞에서 빗소리는 주눅이 든 듯 잠잠해졌다. 그녀의 소리는 내 안으로 깊숙이 스며들어 강렬한 에너지를 만들어냈고, 폭발할 듯 응축된 에너지를 나는 그녀에게 새로운 형태로 되돌려주었다.
나는 그녀의 옆에 나란히 드러누웠다. 이제 빗소리뿐 아니라 빗줄기도 가늘어져 있었다. 그녀는 되돌려 받은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해 계속해서 크릉, 크릉, 잦아드는 천둥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고생해서 오기를 잘했군, 싶은 생각이 빗줄기가 되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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