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을 중간쯤 읽고 있을 무렵 왕규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후 세 시쯤이었다.
“혹시 어제 나랑 노래방에 갔소?”
“아니요.”
노래방이 아니라 가요주점에 갔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렇지, 고 선생이랑 그런 곳에 갈 리가 없지. 그런데 이상도 하지…… 아마 꿈인 것 같소. 고 선생하고 노래방에 갔는데, 고 선생이 화장실에 다녀오더니 내 첫사랑을 데리고 나타났지 뭐요. 내 첫사랑이 누군지 고 선생이 알 턱이 없잖소.”
“네, 저야…… 당연히 모르죠.”
“꿈이란 건 참 요상도 하지. 내가 요즘 SNS를 통해 30년 만에 첫사랑을 접하게 되었다오. 그런데, 지금 내 처지에 어디 첫사랑을 만나게 생겼소? 그녀는 화려한 궁전 같은 곳에서 머엇진 남자와 남 부러울 것 없이 살고 있을 텐데 말이오.”
나는 대답 없이 듣고만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꿀룩꿀룩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카아, 소리가 뒤를 이었다.
“첫사랑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하도 강렬하다 보니 꿈에 나타난 것 같소.”
유리컵에 술 따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또 술 드시고 계세요, 이 시간에?”
“헛된 망상을 말끔히 지우려고 마시고 있는 거라오.”
역시, 왕규에게 모든 길은 술로 통했다. 세상이 알코올 공화국이 된다면 높은 자리 하나 꿰찰 수 있을 텐데…….
“만나서 함께 마시려오?”
“아니요, 전 낮에는 절대 마시지 않습니다.”
“하긴, 그러는 게 낫겠소. 요상한 꿈을 꾸고 나서 일어났더니 마누라가 몹시도 보고 싶어집디다.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착한데, 내가 미쳤지……. 생각만으로도 그런 벌 받을 짓은 하지 말아야지. 그래, 술 마시고 좀 있다가 오랜만에 마누라한테 다녀올 생각이오.”
“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왕규와 통화를 마치고 나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이구, 주말에 전화를 다 주고,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거야? 로또에 당첨이라도 된 거야?”
“사장님, 일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왕규가 괴롭혀? 같이 술 안 마셔주면 죽이겠다고 협박해?”
“아닙니다. 잘 대해주십니다.”
“그런데 왜?”
“아무래도……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월요일부터 바로?”
“그랬으면 합니다만…… 직원 구할 때까지는 하겠습니다.”
“아니야,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단기간에 돈 벌고자 하는 알바생들은 넘쳐나니까. 그럼 월요일 점심 때 출판사에 한 번 들러. 점심이나 함께 하면서 얘기 나누자고.”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때 보자고.”
통화를 하면서 문득 거울을 보니, 내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였다. 유리가 떠난 이후로도 줄곧 집 안에서는 옷을 벗고 지냈었는데, 나도 모르게 일어나자마자 옷을 찾아 입은 것이었다. 날씨가 쌀쌀해져서인지도 몰랐다.
오랜만에 나는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