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상인이 떠난 자리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졸업식이 끝난 교정은 설레는 목소리와 사진기 셔터 소리로 가득했다.

친구들은 꽃다발을 들고 웃었고,
선생님들은 마치 오래 묵은 짐을 내려놓은 듯 편안한 표정이었다.

그 속에서 나는 조용히 숨을 골랐다.
이제야 많은 것들이 제자리를 찾았다는 걸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민수는 사진을 찍으며 내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야, 우리 고1 때 그 싸움 기억나냐? 그땐 진짜 어색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땐 내가…좀 많이 못났었지.”

“아니지.이제는 멋있어졌다니까, 너.”

민수의 말투에는 어색함이 없었다.
예전엔 ‘말로만 친구’였던 사이가,이제는 조용히 서로를 지켜주는 사이가 된 것이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하린이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예전처럼 마음이 조여오지도,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하린은 잠시 나를 보더니 씩 웃었다.

“야, 준호! 좋은 대학 가서 봐!”

“너도! 꿈 잃지말고 계속 나아가!.”

우리는 다시 연인이 되지도 않았고, 영원한 친구를 약속하지도 않았다.
그저 따뜻하게 서로를 응원할 수 있는 좋은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교정 한쪽, 조용히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아빠. 아빠는 많은 학부모들 사이에서 조금 멀찍이 서 있었지만,

내가 보자 살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아빠는 종이봉투를 건네며
수화로 말했다.축하한다.수고했다.정말 잘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아빠도… 고마워요.”

예전 같았으면 이 말을 하는 데 며칠은 걸렸을 텐데,
이젠 숨 쉬듯 자연스러웠다. 아빠와의 거리는 이제 ‘두려움의 거리’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거리’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한 곳만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교정 한쪽에서 햇빛을 맞으며 서 있다가
그 순간 문득 아주 오래된 냄새 하나가 떠올랐다.

낡은 천막에서 풍기던 묘한 먼지 냄새, 주전자에서 피어오르던
따뜻한 김 냄새, 그리고 아저씨가 사과 껍질을 벗길 때 잠깐 스치던
시큼한 향기까지.그 향기는 어떤 질문과도 같았다.

“…잠깐,다녀올까?”

나는 꽃다발을 가방에 넣고,졸업식장 문을 나섰다.

발걸음은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아빠에게 말했다.

“잠깐 어디 좀 다녀올게요.”

아빠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나에게 말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나는 졸업식장 문을 나섰다. 발검음은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그 골목으로 향하고 있었다.

골목의 적막 오랜만에 도착한 골목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천막은 그대로였다.나무 상자들도 그대로였다.
테이블의 작은 흠집까지 졸업하던 아침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런데 단 하나, 그곳에 있어야 할 한 사람만 없었다.

나는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주전자도,빗자루도, 아저씨가 늘 정리하던 낡은 통도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 아저씨만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 나는 조심스럽게 불러보았다. 대답은 없었다.

그저 바람이 천막 가장자리를 스칠 뿐. 이상했다.

아저씨가 없는 골목은 마치 숨을 멈춘 방처럼 적막했다.

나는 천막 안쪽까지 걸어 들어갔다.
혹시 뒤편에서 뭔가 정리하고 있는 건 아닐까,천막 밖으로 벗어나 잠깐 어디 간 건 아닐까.
나는 몇 번이고 골목 양쪽을 번갈아 보며 작게 이름을 불렀다.

“…아저씨! 저, 졸업했어요. 그래서…왔어요.”

한참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만 골목을 지나가다가

잠깐 멈춘 듯 내 옆에 앉았다가 다시 떠나는 것처럼 스쳤다.

나는 천막 기둥에 손을 올렸다.
조금 싸늘하고, 조금 익숙하고,조금 비어 있었다.

‘왜…왜 없지…’가슴 어딘가가 작게 흔들렸다.

마치 오래 기다린 편지를 받지 못한 아이처럼.

하지만 그 흔들림 한가운데에서
문득 아저씨의 말 한 문장이 떠올랐다.

“너는 앞으로 가야 한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요.그럼… 저는 다음에 또 올게요.”

준호의 한 걸음은 아저씨를 찾지 못한 실망이 아니라,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한 걸음이었다.

나는 골목을 한 번 더 돌아보았다.
천막이 가볍게 흔들렸다.
마치 “그럼 다음에 보자” 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저씨.다음에 다시 올게요.”

그리고 골목을 조용히 벗어났다.
스무 살의 봄 공기가 나의 어깨 너머로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