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아저씨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18장. 아저씨

혼돈과 폭풍 그자체인 나의 10대시절도 머리속에서 지워질 때쯤 나는 이제

결혼을 한 달 앞둔 남자가 되어있었다.

어느 저녁이었다. 나는 양복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휴대폰 화면에 쏟아지는 알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예식장 예약 확인 문자,신혼집 전세 계약서 사진,
장모님이 보내온 이모티콘,그리고 아빠의 조심스러운 한마디.

“너… 괜찮겠냐?이제 너만 생각하고 살긴 힘들 텐데.”

그 말이 마음 한 곳을 오래 찔렀다.

나는 결혼을 한다.곧 누군가의 남편이 되고 언젠가는 누군가의 아빠가 될 것이다.

그런데…희생이라는 단어가 계속 걸렸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스스로도 명확히 말할 수가 없었다.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어디선가 오래된 목소리가 떠올랐다.

“희생은 너를 태우는 일이 아니라 네가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를 정하는 방향이다.”

이상한 골목 상인 아저씨.그 사람의 말투였다.

그리고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이 질문을 들고 갈 곳은 결국 그 골목뿐이라는 것을.

겉옷을 챙기며 현관을 나섰다.밤공기가 가볍게 피부를 스쳤다.
발걸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도로는 많이 변해 있었다.
새로 생긴 빌라들,바뀐 체육관 간판,젊은 부부들이 밀고 다니는 유모차.

하지만 골목으로 가는 방식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도망치다 지쳐 돌아오던 열여덟의 나처럼,
오늘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품고 그 골목을 찾아가고 있었다.

골목 입구에 도착했다. 가슴이 벅찼다 다시 볼 수 있다는 감정,또 나를 찾아 낼 수 있다는 믿음.
숨이 조금 멎었다.거기였다.정말 그대로였다.

낡은 벽돌 담장,비뚤게 굽은 전봇대,그 사이로 얇게 드리운 하늘 조각.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그 골목은 어딘가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나는 천천히 안으로 걸어갔다. 발자국 소리가 작게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다.
해진 천막, 그 아래 쌓여 있던 낡은 나무 상자들, 아저씨가 늘 걸터앉아 있던 자리.

그런데 딱 한 가지가 없었다.

아저씨. 나는 천막 앞에서 멈춰 섰다. 마치 오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네듯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대답은 없었다.

바람만 천막 가장자리를 스치며 천천히 흔들었다.

마치 오래 묵은 방처럼 적막이 쌓여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천막 안쪽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기둥을 손으로 만져보았다.

차가웠다. 그러나 낯설지는 않았다.

한참 동안 양쪽 골목을 번갈아 보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불러봤다.

“아저씨…저 왔어요. 그 준호요.” 바람만 스쳐 지나갔다.

영영 떠난 듯했고, 잠시 자리를 비운 듯하기도 했다.

어떤 마음인지 알 수 없었다.서운함도 있었고,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나는 예전처럼 아저씨를 찾아 헤매지 않았다.

다만 천막 아래의 빈자리를 보며 나는 알고 있었다.

“아…이젠 내가 혼자 서야 하는 순간이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 한가운데가 조용히 흔들렸다.

나는 상자 위에 쌓인 얇은 먼지를 손끝으로 쓸어냈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작은 책 한 권이 드러났다.

겉표지는 시간에 눌린 종이처럼 연한 갈색.
글씨 하나 없는 공책 같은 책. 나는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책의 무게가 이상할 정도로 가벼웠다.

“뭐지…”

나는 첫 장을 펼쳤다. 삐뚤삐뚤한 글씨가 한가운데 적혀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준호야. 가슴이 뜨겁게 조여왔다.

나는 책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천막 아래는 조용했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아저씨의 자취,아저씨의 눈빛,아저씨의 목소리.

그리고 그 빈자리에서 내가 찾아온 질문 하나.

“희생은…도대체 무엇일까요.” 아저씨는 없었다.

하지만 그 답을 찾을 단서는 이미 내 손안에 있었다.

나는 책을 끌어안고 골목을 천천히 빠져나왔다.

정확히는 몰랐지만 어렴풋이 느껴졌다.

희생이란 누군가에게 나를 던져주는 일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힘이라는 것.

그리고 그 힘이 이제는 내가 스스로 찾아야 할 질문이라는 것.

나는 다시 한 번 골목을 돌아봤다. 천막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마치 “잘 왔다, 준호야.” 하고 말하는 것처럼.

나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 더 이상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제는 나 혼자 걸어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