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책 속에 적힌 글

이상한 골목 상인

by 아르칸테

19장. 책 속에 적힌 글 — ‘오랜만이구나’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양복 재킷도 벗기 전에
그 책을 식탁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표지는 오래되어 보였지만 손에 닿는 온도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다.
마치 누군가 방금까지 들고 있었던 것처럼. 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시고

천천히 책장을 펼쳤다.

첫 장,
그 글씨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준호야.

그 한 줄로 나는 스무 살의 겨울, 열여덟의 여름,
그리고 그 골목의 냄새까지 한꺼번에 떠올렸다.하지만 두 번째 장을 넘기자

나는 멈춰 섰다.그곳에는 아저씨의 글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했던 말들, 내가 품었던 생각들, 내가 울면서 적지 못했던 마음들이
조용히 정리돼 있었다.

글씨체는 크기도 다르고 매 장마다 느낌도 다르지만 내가 살던 시간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첫 번째 기록 “왜 나만 해야 돼요?”

내가 열여덟 살 때 합리화에 짓눌려 울던 그날의 문장이었다.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가 이어졌다. “이 말은 네 마음이 아프다는 신호다.

책임이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다는 증거다.”

나는 한참 동안 그 문장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도 몰랐던 내 속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히 옮겨놨을까.
이 글들은 너무도 정확하게 그날의 나를 알고 있었다.

마치 내 안의 목소리가 그대로 종이에 새겨진 것처럼.

두 번째 기록

다음 장을 넘겼다. “책임은 결과가 아니라 방향이다.”

이건 아저씨가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아래 적힌 기록은 아저씨의 문장이 아니라 그 말을 듣고 멍해졌던 ‘나’의 마음이었다.

“나는 그때 도망치지 않는 법을 배웠다.
그 작은 움직임이 내 삶의 첫 희생이었다.”

희생… 그 단어가 다시 가슴을 스쳤다.

이 책은 희생을 ‘아프게 버티는 일’이라고 쓰고 있지 않았다.
‘나를 태우는 일’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움직이는 나, 도망치지 않는 나,조금 더 나은 나 를 향한 선택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 기록을 읽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

나도 몰랐던 내 성장의 조각들이 이 책 안에서 하나씩 빛을 찾고 있었다.

세 번째 기록

다음 장에는 연애가 끝났던 그날, 하린을 붙잡고 싶어 조급해하던 나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사랑은 붙잡는 순간이 아니라놓아도 미워하지 않는 순간에 자란다.”

그리고 그 아래, 또박또박한 글씨.

“희생은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을 맑게 하기 위한 선택이다.
상대를 잃지 않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하는 것이다.”

나는 숨을 깊게 들이켰다.

그 말이 내가 오늘 이 책을 찾으러 간 이유와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희생은 버림이 아니라 나아가는 것이다.
희생은 포기가 아니라 성숙이다.

희생은 나를 지워 상대에게 맞추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을 다잡아 내가 선택하고 싶은 방향으로 서는 일이다.

그 말이 오늘의 나에게 너무 깊게 들어왔다.

네 번째 기록

다음 장에는 내가 처음 아빠와 화해하려다 문 앞에서 한참 망설이던 그날의 기록이 있었다.

“너는 아빠를 용서한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 적힌 말.

“가족을 향한 희생은 상대를 바꾸려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내 안의 두려움을 직면하는 순간 비로소 시작된다.”

나는 책을 조용히 덮었다.희생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을 들고 그 골목을 찾았는데, 지금 나는 알 것 같았다.

희생은 누군가를 위해 무너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
조용히 단단해지는 과정이었다.

그 과정이 도망치던 나를 안아준 것이고, 사랑에서 무너진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이고,
가족 앞에서 떨리던 나를 다시 앞에 서게 만든 것이었다.

희생은 내가 더 넓어지는 일. 나는 책을 다시 펼치고 마지막 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짧은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희생의 첫걸음은 타인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너 자신을 이해하려는 공감에서 시작된다.”

나는 눈을 감고 그 문장을 오래 붙잡았다.

이 책은 아저씨의 가르침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걸어온 길이었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래. 나 이제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있겠다.”

책을 가만히 닫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떤 답을 찾은 게 아니라,

내 안에 묵혀있던 하나의 길이 마침내 이어진 느낌.

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 한 장,
그리고 마지막 깨달음뿐이었다. 나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다른 페이지와 달리 글씨가 정갈했고, 여백이 많았다.

마치 정답을 말하려는 글이 아니라 오래 고민한 끝에 내려놓은 고백처럼 보였다.

페이지 맨 위에는 조용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

〈희생이란 무엇인가〉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그 아래 적힌 글을 읽기 시작했다.

“희생은 나를 비우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의 중심을 다시 정렬하는 일이다.”

“누군가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희생이 아니라,
내 안의 두려움과 욕망을 조용히 가라앉히고 내가 선택하고 싶은 나를 선택하는 것이 희생이다.”

“희생은 손해가 아니라 방향이다. 내가 어떤 인간으로 살고 싶은지 묻고 또 묻는 태도다.”

“희생에는 관객이 없다.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면 그건 거래이고,
기대가 실리면 그건 감정의 빚이다.
진짜 희생은 아무도 모를 때에도 내가 옳다고 믿는 쪽으로 서는 일이다.”

“희생은 감정이 아니라 결심이다.
흔들려도 다시 돌아오는 중심,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방향, 그 반복 안에서 사람은 단단해진다.”

“희생은 ‘나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나를 크게 만드는 일’이다.” 나는 페이지를 덮지 못하고

오래, 정말 오래 그 문장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지난 10년의 시간들을 다시 불러내는 것 같았다.

열여덟의 나,도망치던 나,울며 변명하던 나,붙잡고 싶어 몸서리치던 나,
그리고 다시 걷는 법을 배워가던 나.

그 모든 날이 이 마지막 페이지에서
하나의 말로 묶여 있었다. 희생은 결국 나를 넓히는 일이다.

나는 책장을 천천히 닫았다.
가슴 어디선가 묘한 울림이 번져갔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사람이 어른이 된다는 건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깊게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이해의 중심에
‘희생’이라는 조용한 결심이 자리한다는 것을.

나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다음 페이지, 마지막 깨달음이 이제 조용히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조용한 집 안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띠— 띠— 띠—

문이 열리고, 차가운 겨울 공기와 함께
내 여자친구 이제 곧 아내가 될 사람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왔어?”
나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

“응.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해?”

그녀의 시선이 식탁 위에 놓인 책으로 향했다.

“이거… 그 골목에서 가져온 거야?”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가와 의자에 앉고 책 표지를 손끝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희생이 뭔지…생각하고 있었어.”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희생이 뭐라고 생각해?”

나는 한참 고민하던 마음을 한 문장으로 꺼내놓았다.

“…나를 버리는 게 아니고, 나를 넓히는 일인 것 같아.”

그녀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나를 버리는 게 아니라…?”

“응.” 나는 책을 가볍게 두드렸다.
“누가 힘들다고 해서 내 삶을 통째로 던져주는 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위해 조용히 단단해지는 과정. 그게… 희생인 것 같아.”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했다.

“…그거, 좋다.”

나는 웃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근데 너는? 넌 희생이 뭐라고 생각해?”

그녀는 손가락을 깍지 낀 채 책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

“음… 나는 이게 희생이라고 생각해.”

“뭔데?”

그녀는 천천히 말했다.

“상대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는 대신,그 사람이 다시 서도록 내 발을 조금 넓혀주는 일.”

나는 그녀의 말을 곰곰이 음미했다.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게 아니라, 다시 서도록…?”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신 서주는 게 아니라, 내가 조금 넓어져서 같이 서는 거.”

가슴 한쪽에서 따뜻함이 번져갔다.

“준호.” 그녀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우리 결혼하면…힘든 날도 많을 거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말이야. 나는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너를 조종하고 싶지 않아.
내가 힘든 날 네가 나 대신 버텨야 한다는 말도 하고 싶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명확했고, 단단했다.

“대신…우리가 서로를 조금씩 넓혀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 말이 책 속 마지막 페이지보다 더 깊게 박혔다.

“그래.”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우리…같이 넓어지자.”

그녀는 웃었다. 아주 오래된 불안을 한 번에 풀어주는 미소였다.

그녀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씻어. 내일 큰 날이잖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 위의 책을 다시 바라보았다.

그 안에는 열여덟의 내가, 넘어진 내가,
도망치던 내가, 다시 걷기 시작한 내가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옆에 새로운 문이 하나 더 열리고 있었다.

내가 지켜야 할 사람.함께 넓어질 사람.
앞으로의 ‘나’를 함께 직면할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문. 나는 천천히 대답했다.

“…응. 이제 씻고… 내일을 만나러 가야지.”

집 안은 조용했지만 따뜻했다.

그 온기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어른이 된다는 성장이’ 누구를 잃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나를 더 넓히는 일이라는 걸 또렷하게 느꼈다.

그리고 문득, 마지막 페이지가
날 천천히 부르듯 떠올랐다.

희생은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서기 위해 내 발을 넓히는 일이다.

그 문장을 마음에 안고 나는 욕실 쪽으로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