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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18. 2017

임시완의 미완의 소격 효과 <불한당>

제목이 <불한당>이라고 하니 영화를 채 보기도 전에 벌써 불한당이라는 주인공의 전시 목적적인 폭력과 악하지만 차마 미워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정의감이 그려진다. 여기에 땀과 피로 범벅된 포스터까지 보게 되니 벌써 영화 한 편을 다 본 느낌이다.


감정적으로 이입될 정의감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건 <불한당>의 지극히 남성적인 포스터가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면서도 그걸 비틀어 의외성을 만들 수 있는 아이러니의 규칙을 인물로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아르와 훈남, 누아르와 미소년, 누아르와 임시완. 어쩌면 이런 결합은 이제 정말이지 하나의 패턴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검사 외전> 이후로 이미 패턴이 된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류의 영화를 굳이 다 챙겨보지 않아도 괜스레 지겨운 기분 때문에, 영화를 채 보기도 전에 혹자들은 그 식상함에 혀를 내두르기도 할 것이다. 영화 산업에 투자-배급망이 더욱 강하게 결탁되면서 극의 전개 조차도 이제는 카타르시스의 패턴화를 이루어낸 듯하다. 엇비슷한 장면의 일변을 저마다의 영화들이 그저 변주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경찰이 나오고 감옥이 나오고, 카메라도 함께 액션을 취하며 블랙코미디를 가미한 버디무비이면서 누아르의 욕망은 다층적으로 좇는 한국형 남자 영화들.


<불한당>은 바로 저 반복적으로 나오는 대사 "아직도 나 의심하는 거예요?"를 바탕으로 깔고 경찰-깡패 누아르의 기본부터 심화까지 차근차근 배열해 놓은 영화다. 그래서 <불한당>의 재미와 오락성을 이야기하는 건 참 쉽다. 너무 많이 봐온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아무튼간에 <불한당>은 역시나 안타깝게도 의외성을 발견할만한 서사의 독특성은 거의 없는 편에 가깝다(오히려 이 영화의 미덕은 영상에서 찾을 수 있다. 단체 폭력 장면의 달리 샷은 '이건 여기에도 나오네' 싶지만, 때때로 등장인물들을 뜬금없이 외롭게 붙들어 매는 <불한당>의 카메라 워킹과 각도는 때때로 특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한당'은 누구이며 그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는 모락모락 피어난다. 임시완이라는 너무나도 이런 영화에 안 어울리는 배우가 출연했기 때문이다. 이건 임시완이 저런 얼굴로 포스터에서 관객을 멍하니 응시하는 이유를 존재론적으로 탐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노골적으로 임시완은 느와르의 모든 것을 바른 얼굴로 전시되어 있다


설마 임시완이라는 이 예상치도 못한 배우를 액션 누아르 안으로 데려 와서 폭력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데에만 쓰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미 관객들은 이 임시완이라는 배우의 출연에 대해 적지 않은 걸 기대하고 있다. 누아르가 극적으로 중요하기보다는 정말이지 영화에 갑자기 들어온 배우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 오빠 생각의 바로 그 오빠, 미생을 사는 장그래, 변호인의 그 대학생 오빠 임시완은 왜 이런 몰골로 포스터에 가득 들어와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가.


우리는 '의심'이라는 저 의뭉스러운 워딩만큼이나 많은 의외적인 활약을 임시완에게 기대하게 된다. 하얗고 연약하고, 착한 오빠 같은 임시완이 예상치도 못하게 폭력에 물든 모습. 즉 이건 임시완이라는 배우를 알고 있는 관객에게 존재 자체가 던지는 소격 효과이다. 한국형 누아르의 익숙한 평가만을 기대하고 있던 <불한당>에서 새로운 발견을 해야 한다면 그건 임시완 자체에 다름 아니다.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하얗고 예쁜 남자 배우에게 부여된 의외의 캐릭터, 익숙하지 않은 풍경, 위태로운 폭력 씬 그 자체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불한당>을 보고 나면 궁금해질 것이다. 이런 기획을 정말이지 성공적으로 영화 안에서 수행하였는가. 임시완에게 덧씌운 소격 효과와 의외성은 임시완의 캐스팅에서 그칠 이슈를 극적으로 뛰어넘었는가.

 

눈호강, 귀호강이 원래 임시완이라는 사람에게 주어진 임무이긴 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불한당>은 이런 모호성을 바탕으로 임시완이 분한 현수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설계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불한당>의 현수는 정말이지 모든 것이 모호한 인물로 나타난다. 이 영화에 임시완을 데려온 동기도 이와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불한당>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배우의 '온도 차' 나는 반짝이는 등장과 존재 그 자체. 그러나 이 영화가 그를 활용하는 방식은 바로 이런 외피적인 것에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불한당>에서 가장 궁금하고 가장 의뭉스러운 것은 결국 이런 파격적인 시도로 들어온 배우를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카메라는 내내 현수를 비추고 있지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좀체 구조적으로 알려주지는 않는다. 이건 그의 정체성을 불친절하게 표현하는 것에서 시작해 계속 그렇게 질질 끌다 영화가 끝나버리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이 영화에서 그의 행동과 용기 자체는 모호하지만 시도는 항상 궁금한 존재로 나타난다. 무언가 분석할만한 맥거핀은 차고 넘치지만 그게 어떤 상징을 겨냥하고 있는지는 좀처럼 조립이 되지 않는다. 엄마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 존재를 위한 행동과 치밀함은 약하다. 뜬금없이 발휘되는 남성성은 의도적으로 거세되어 있어 자신의 것이 아닌 어색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런 정체성이 형성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언급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사라졌고 세상에 가족은 하나뿐인-엄마의 아들이기는 하지만, 이런 내적 동기가 모든 판단과 삶의 이유라고 이야기하기엔 그의 삶이 자세하지도 않다. 때때로 마치 여성적으로 그려지는데 이런 중의적인 묘사가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 같지도 않다. 이런 어설픈 모호함은 임시완이라는 배우를 데려다 무언가 특별하면서도 참신한 캐릭터를 만들고 싶은 감독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으나 무언가 길을 잃은 형상이다. 이런 동기가, 그리고 임시완이라는 소격 그 자체인 배우가 매끄럽게 조립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현수라는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동안은 이런 비슷비슷한 영화가 수없이 쏟아진다고 평론 일선은 물론 일반 관객들 사이에서도 불만의 소리가 꽤 나왔던 것 같다. 하나의 '류'가 된 이런 영화들의 원류가 어디서부터 인지 명확하게 짚어내기는 애매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런 영화들의 스타일의 패턴화가 고착된 것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도매금'으로 묶일법한 수많은 한국 영화들 중 일부의 영화들은 이런 몰개성의 위기를 빗겨나갈 수 있는 방법을 캐릭터에서 찾기도 한다. 캐릭터가 성공하거나 아주 독특하거나 아주 이질적이라면 그 영화는 어쨌든 그런 몰개성에서는 빗겨나갈 수 있는 지점을 찾은 것이기는 할 것이다. <불한당>은 바로 그 지점을 임시완이라는 배우에서 찾았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경찰이지만 경찰로 살아갈 수 없고, 의지하고 싶은 사람에게는 믿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현수의 정체성에 대한 영화. 하지만 조립되지 못한 부분이 많아서 역시 아쉬운 영화다. 이건 현수에게도, 임시완이라는 배우의 등장에도 해당하는 이야기이다. 뜬금없지만 처연히 빛나는 임시완의 눈물 흘리는 장면만큼 날카롭게 파고들지 못한 캐릭터의 미흡한 전략이 아쉽다.


그래도 왠지 계속 이런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은 그 안에서 새롭게 이야기될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거나, 그 누군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깨끗하게 해소되지 못한 봉인된 카타르시스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쩌면 이런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탄생되어도 관객들이 찾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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