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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21. 2017

목소리(들), 이렇게 보여줄 순 있다 <목소리의 형태>

<목소리의 형태>라는 영화가 개봉하였다. 제목만 보고는 거의 고다르와 같은 메타 영화인가 싶었다(<언어와의 작별>처럼 '언어'에 대한 것을 논하는 영화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기대를 어떤 지점에서 찾는가는 사람마다 다르기는 하겠지만, 나의 경우 이 영화의 제목은 다분히 개념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는 모양새이기 때문에 서사보다는 바로 그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매개의 형태에 대한 고찰인 줄 알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런 고찰은 생각보다는 많이 겉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이 영화는 이지메 사태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폭력으로 시작되며, 무언가 전형적이기도 한 역지사지라는 반성의 프로세스 속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죽음이라는 선택지가 주인공들의 심리 저변에 늘 깔려있기는 해서 단순히 아름답게 끝나거나 훌륭한 교훈만을 단선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긴 하다.



화해를 위한 전개는 의사소통의 전형적인 상호 대응 관계를 '예상대로' 초월해 있기는 하다. 중심이 되는 주인공은 말을 할 수가 없고 이런 등장인물과의 소통을 위한 방식은 목소리를 넘어서 수화와 필담, 표정과 행동이 복합적으로 동원된다. 게다가 신체 핸디캡을 가지고 있는 피해자를 할퀸 '이지메'라는 폭력은 피해자든 가해자든, 어느 쪽으로든 결론적으로는 트라우마를 발생시키는데, <목소리의 형태>의 서사가 그 트라우마를 이지메의 파국 이후에 반대편의 주인공을 통해서 변주될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예상할 수밖에 없다. <목소리의 형태>는 바로 이런 변주를 아주 관념적이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여러 가지 의사소통의 수단들을 통해서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가끔 목소리를 내뱉는, 말을 할 수 없는 여자 주인공의 말소리는 예상대로 거의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발화된다. 그리고 역시 안타까우면서도 자못 의지적이다. 게다가 비록 이지메를 당했을지라도 내내 선 의지를 빛내는 여자 주인공과,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로 반성의 깊이를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우리는 이 영화가 정말로 그 의지대로 거국적인 화해를 이루었으면 하는 지경으로 동화가 된다. 그러니까 이런 의지를 관객의 입장에서 어떻게든 알아듣고 그것이 반대편의 등장인물에게도 잘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을 수밖에 없어서, <목소리의 형태>의 러닝타임을 좇는 관객들은 그 강렬한 일본 특유의 방식인 무릎 꿇고 바닥에서 절을 하며 울음 속에서 내뱉는 "미안하다"는 목소리만큼이나 어떻게든 이루어야만 하는 화해의 도착을 바랄 수밖에 없다(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은 바로 그 "미안하다"는 육성이 이 영화에 너무 크게 울렸다는 점이었다. 일본어는 유달리 미안하다는 말이 언어적으로도, 그것에 결합되는 비언어적인 수단도 모두 강렬하다).



목소리와 언어가 전해지는 순간에 대한 폭력적인 묘사, 그리고 사후에 기어코 전해진 미안함의 메시지. <목소리의 형태>가 파고든 것은 그런 개념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 던져진 인간관계 속의 폭력과 그 화해의 수행에 대한 복합적인 차원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런 복합적인 방식을 다루었다는 것만 해도 이 영화가 하려는 메시지의 표출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단지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화해의 순간들이, 선대의 일본 애니메이션과 영화들 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일본의 문화 콘텐츠에서 보았던 익숙한 광경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일 것이다.


단지 익숙함이기만 하면 상관이 없는데 '이지메'라는 소재와 겹쳐지면서 일본산 콘텐츠 특유의 어떤 것을 전형적으로 예상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목소리의 형태>에 대해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렇게 전형적인 해석의 함정에 쉽게 빠질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국가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에 공통적인 네셔널리티를 쉽게 부여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다. 국가라는 틀은 제작과 유통의 편의를 위한 것이기도 하고, 정말로 의식적으로 계보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이상은 그런 임의적인 분류를 가늠 조차 할 수 없는 작가의 세계가 더 높고 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본은 감성 그 자체가 상품이 된 나라이기에, 작품들의 일부적인 감성의 특징을 '일본 영화들'이라는 범 국가적인 틀로 동일시해서도 안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보니 <목소리의 형태>가 전달하려는 더 큰 메시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목소리의 형태>는 기존의 계보적 분석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작품이었으면 한다. 물론 이렇게까지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와 현실 반영의 방식, 차세대 애니메이션 감독의 선두주자인 최근의 어떤 감독들하고는 또 다른 맥락을 새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선대의 작품들을 넘어선 평가도 동시에 받을만한 작품임은 틀림없기는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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