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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24. 2017

사람 사는..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생각하는 많은 것들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렇다. 그러나 하나의 사람과 그에 대한 판단, 지지 같은 건 고등학교 때부터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학 때는 그래도 좀 괜찮았었나...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됐었는데 아버지와 싸운 기억이 많이 난다. 막연하기는 해도 정의라는 가치관을 무시하는 상대방에게만큼은 지기 싫었다. 이건 시민의 정의로 이야기하는 게 옳았지만 그보다는 범위가 작은, 내가 생각하는 정의의 대표 격인 사람에 대한 지지였고 반대로 아버지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비난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늘 그렇게 생각했다. 결국 사상과 가치관을 넘어선 사람에 대한 일이었다. 그럴수록 나는 내가 믿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더욱 견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겉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자칫 이야기했다간 아버지와의 경험에서처럼 정작 서로의 관계와는 상관없는 사람과 일 때문에 서로가 부자유스러워지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왜 그 사람을 지지하는지 나에게 100가지 이유를 물어보기도 하였다. 거기에 지지 않고 비록 아무렇게이긴 했지만 마구 주절대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생각을 지니면 안 되는 이유, 소위 이런 사람과 이런 시대와 연대가 나쁜 이유를 굳이 말하는 상대편에 선 아버지의 인상도 기억이 난다. 그땐 그런 상황이 모두 불쾌한 일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관계가 되었을까 하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앞선다. 하지만 이런 기억들보다도 더욱 슬픈 풍경들이란 내가 대학에서 마지막 학기를 보내며 의미 없는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던 5월 말의 서울이다. 내가 서울에서 살면서 가장 슬픈 광경들을 보고 지냈던 때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우는구나를 느꼈을 때다. 이런 시대를 지낸 사람들 속에서, 나와 같이 딱 한 방울만 눈물 흘려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제는 쉽게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기회 같은 것이 생겨도 여전히 무언가 투쟁적이고 지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아직도 무언가 편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크기만큼 지지 할 수 있고 판단하는 것, 맘 편히 제대로 표현하는 것을 이제는, 해도 될 때가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사람이, 사는 세상. 사람 사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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