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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24. 2017

내 인생 안의 눈부신 침입자 <나의 눈부신 친구>

'우정'이라는 건 굳이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삶에 꼭 필요한 정신적, 감성적 자양분이다. 단지 친구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누군가와 맺는 그 수많은 관계들을 아우르는 단어다. 게다가 한국어에서 이 단어는 '정'이라는 뜻을 내포하면서 더욱 단어가 규정하는 사전적인 뜻 이상의 많은 감정적인 울림을 준다. 


우정, 친구.. 그래서 이런 단어들을 떠올릴 때면 무언가 슬프기보다는 아름답고, 따뜻하고, 편안한 정조부터 그려진다. <나의 눈부신 친구>라고 제목이 붙은 이 책도 마치 그런 느낌들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사는 동안 알게 된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빛나고 찬란한 동반자. 그게 '친구'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친구를 생각한다는 것이 언제나 둥글둥글하게 선한 것은 아니다. 날카롭고 치명적이게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런 게 바로 사람과의 관계고 친구와의 관계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다행히도 친구에 대한 지극한 찬사와는 다른, 타자를 대함에 있어서의 묘한 감정들을 담고 있다. 친구라는 존재는 항상 곁에 오래 두고 사귀는 벗이기는 하지만 이 말이 언제나 이상적이 조화로운 관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이탈리아 전후 1950년대를 배경으로 자유도 온전히 누릴 수 없고 공부나 연애보다는 생활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한 두 여자아이, 지근거리에 사는 친구들이 세계의 전부인 레누와 릴라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매우 소박한 배경에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오히려 그 소박하게 좁혀져 있는 세계는 이들의 관계를 더욱 밀착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깊이 있는 풍경이 된다. 


비슷한 조건에서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나와 너무 가까이에 있는 친구라는 타자는 끊임없는 비교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의식적인 감정들. 이것은 의식한다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방향과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 영향을 준다. 어른들의 친구 세계는 다분히 이런 상황들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도 알게 모르게 친구라는 존재는 어른 못지않은 그런 영향들을 주곤 했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바로 그런 친구라는 존재가 나의 선택과 가치관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인공의 어린 시절을 내내 의식적으로 좇는다.



내가 어린아이 일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순수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의 눈부신 친구>는 그런 막연하기만 한 독자의 생각을 끊임없이 찌른다. 어렸을 때는 정말 그저 순수하게 친구와 지내지 않았나? 비교도 의식도 없이 지냈던 것 같은데?라고 막연히 지나친 그런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 꺼내보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독자들의 어린 시절 속에 드문드문 '비교항'으로 놓여있던 그 어떤 친구들을 부르게 한다. 물론 아주 대단한 사건들은 아니다. 지극히 사소한 사건과 의식들이다. 친구 집의 엄마와 아빠는 어떤 지부터 시작해서 저 친구는 몇 살 때 생리를 시작했는데 나는 아직이네. 저 친구는 안경이 어울리는데 나는 별로 안 어울리는데. 쟤는 시험에서 몇 점인데 나는 몇 점이라는 것들 등등. 


생활에 있어 친구라는 존재는 우정 어린 벗이 되기도 하지만 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이래도 '괜찮은지'를 계속 따져보게 하는 존재가 된다. <나의 눈부신 친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그래서 역설적으로 친구의 '눈부심'을 내내 드러낸다. 아름답고 멋있는 친구를 묘사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존재감을 내 인생 속에서 드러내는 친구라는 존재를 이야기한다.


이 책을 처음 쥐고 보게 되었을 때 이 어마어마한 연작소설은 얼마나 길고 아름다운 우정을 그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아름다운 우정의 대 서사시가 싫은 것은 아니지만, 지극히 아름다운 것만을 내내 본다는 것은 결국 관계의 굴곡을 회피한 억지 미화에 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작은 <나의 눈부신 친구> 단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줄거리를 말하는 것이 반쪽짜리도 채 못 되는 말이 된다. 줄거리보다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주인공들의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이 <나의 눈부신 친구>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요체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음 이야기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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