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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26. 2017

<노무현입니다>

눈이 아닌 마음으로 영화를 볼 때가 있다. 극영화보다는 다큐멘터리가 더욱 그런 것 같다. 영화는 영화 그 자체로 예술적인 목적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영화를 본 관객 저마다의 삶을 되돌아보고 말하기 위한 매개가 되어야 할 때도 필요하다.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나니 신념이라 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 결국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필이면 그런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시대도 이제 막 도착한 것 같다.


 다큐멘터리는 과거의 시간을 동시대 안으로 부르는 힘이 있다. 내가 몰랐던 과거의 사건들, 사람들, 순간들이 지금 영화를 보는 오늘의 순간들로 소환되어 내 눈앞에 펼쳐지면, 다큐멘터리 속 내가 몰랐던 것들은 내가 지금 바로 알고 있는 현재적인 것들이 된다. 마치 지금도 종로 혹은 부산 어딘가에서 우뚝 서있는 것 같은.. 재야의 인권변호사, 정계 입문과 3당 합당, 수차례의 낙선, 2002년의 경선, 대통령 당선, 2009년 봄의 노제.. 속 사람(들)을 본다. 과거의 시간들을 다시금 돌아보니 막연히 슬픔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들이다. 지난 시대에 대한 절망과 분노 같은 환기도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 노무현의 승부사적 기질과 기개에 경탄하는 것도 아니다. 닮고 싶은 우러름이 마구 피어난 것도 아니다. 물론 전술한 생각들이 아주 안 난 것은 아니지만...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시대에 대한 그리움이 되고, 그것을 지금 다시 재현해내고 싶은 욕망이 더 크게 피어났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영화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린 관객들은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아쉽다고도 하는 것 같다. 혹은 이렇게라도 영화가 되어 만나게 된 사실만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다. 어쨌든 영화라는 사실을 혹자들은 순간순간 까먹는다. 영화라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잊었다기보다는 이게 영화가 되지 않아도, 영화적으로 굳이 아름답지 않아도 보고 싶은 그 무엇이 영화 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이 영화가 좇는 과거의 시간들, 그리고 사람들의 이런 마음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웬만하면 울지 않는데 이 영화가 그 목록에 추가되었다.


내가 몰랐던, 혹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떠나버린 사건들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뒤늦게 꺼내어 보면 나의 세계 속의 현재로 부활하면서 어떤 쾌감을 준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곁에서 떠나지 못한, 혹은 다시금 되살아난 기억과 마음을 다큐멘터리로 보면 저마다의 마음속 현재적인 것들이 급기야 진짜로 현현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물론 정말로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다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인 특성을 상기해보면, 지나가버린 시간들을 그저 영화라는 물리 안에 다시 새겨놓았다는 사실에서는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에 다큐멘터리는 마치 역사 교과서가 그러하듯이 미래를 잘 살기 위한 방법 같은 것을 넌지시 알려준다. 이런 방법을 긍정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면 그건 앞날에 대한 희망이 될 것이다. 이창재 감독의 말대로 이 영화는 슬픔과 애도보다는 희망을 택한 편에 가깝다. 모두가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희망을 전달하려고 했다는 점 대해서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굳이 이런 단어를 쓸 필요는 없지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은, 그런 희망을 이제는 실현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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