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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May 29. 2017

친구를 그리며 <문라이트>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 집중하고 살아야 하는지 인생의 시작점에서나 할 생각들을 다시 하게 된다. 무언가를 잊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역시 그 답은 언제나 친구다. 정확히는 '친구 같은' 그 무언가 들이다. 친구 같은 엄마, 친구 같은 형제, 친구 같은 동료, 친구 같은 여행... 요즘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깊은 울림을 주는 친구는 책이다. 책은 원래 친구이긴 했는데, 그동안 친하게 지내지 못했다. 


중학교 때엔 세상에서 내가 제일 고민이 많고 내가 제일 희망을 못 찾고 사는 줄 알았다. 누구에 의지하고 살아야 할지, 여기에서 이렇게 살아도 될지, 이대로 이런 처지로 계속 살면 되는지, 어떤 꿈을 꾸어야 할지 잘 몰랐다. 학교에서는 잠만 자고, 숙제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공부조차 하지 않아도 아무래도 괜찮아서 그런 거대한 고민들은 잘 풀리지 않아도 괜찮았다. 친구하고 그런 고민들을 나누고 울면 그만이었다.


친구들만이 나 그리고 너의, 서로의 고독을 보듬어 줄 수 있었을 때였던 것 같다. 같이 서울로 가자 했던 친구, 누가 너를 좋아하는데 너는 어때 하고 자기 마음은 감추던 친구, 언제라도 새벽녘 메신저에서 날 기다리던 친구. 금세 사라진 친구도 있고 서서히 끊긴 친구도 있다.



<문라이트>를 보는데 그 친구들 생각이 났다. 영화 안의 여러 단서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소환했다. 연락을 꼭 하고 싶은 친구들이 있는데 일부러 하지 않거나 거기서 멀리 떨어지기로 했다. 무의식이 눈감아버린 기억들, 혹은 의식적으로 잊은 친구와 일들이 있다. 


이 영화는 흔히들 쉽게 말하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기도 할' '누군가의 추억을 소환할'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가 이 영화를 내면으로 보기 전에 이 소년이 처한 불우라는 환경과 문화적인 맥락을 먼저 읽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라이트>의 어떤 대사들은 어린 시절에 스스로 결심한, 어른이 되는 몇가지 계기들을 떠오르게 한다. 성에 대한 견해라든지, 남들에게 나를 얼마나 열 것인지, 결국에는-인생에 대한 선택과 판단이라든지. 


<문라이트>의 챕터 분리의 순간들 처럼, 그 순간들을 보면서는 내가 어른이 되려하는 기로마다 친구 없이 나 혼자 그 길에 들어서기로 하면서 그들과 연결되어 있던 끈을 끊은 건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많이 흐르고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무언가 잊고 사는 것 같다 생각되는 건, 어른이 되는 분리의 사건들 속에서 헤어진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 나의 어떤 모습들이 누군가에게는 보일 것이다. 달빛이 얼굴을 비추면 그 빛깔이 얼굴에 드러나듯, 나에게도 그런 기억들이 비추어질 때 드러나는 얼굴의 빛깔이 있을 것이다. <문라이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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