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로 읽는 지식재산 6편
"내가 다른 초현실주의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나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작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말이다. 살바도르 달리는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화가 중 하나이며, 스페인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이다. 달리는 독특한 수염과 외모에서부터 오만함과 남다른 기행으로 유명하다.
될 사람은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그는 6세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Royal Academy of San Fernando)에 입학 당시부터 이미 지역의 비평가들에게도 찬사를 받을 정도의 천재로 통했다.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학교는 스페인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이라면 거의 이 학교 출신일 정도로 명문의 학교이다. 현재도 엘 그레코(El Greco), 프란체스코 고야(Franchesco Goya), 루벤스(Peter Paul Rubens),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벨라스케스(Velazquez) 등 거장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달리는 재학 중 성모 아리아 상을 그리라는 과제에 대해 저울을 그려 제출하며, "다른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를 보았겠지만, 나는 저울을 보았다."고 하고, 미술사 시험에서 "이 답은 심사위원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답안을 제출할 수 없다."라고 쓴 답안지를 제출하는 등의 기행으로 퇴학을 당한다. 나중에 달리가 저술한 자서전인 <어느 천재의 일기>에서도 자신의 탄생에 대해 "모든 교회의 종들을 울릴지어다! 허리를 구부리고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여, 지중해의 북풍에 뒤틀린 올리브 나무처럼 굽은 허리를 세울지어다. 그리고 경건한 명상의 자세로 못박힌 손바닥에 뺨을 기댈지어다. 보라,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났도다!"라고 쓰고 있을 정도이다.
이후 루이스 부뉴엘(Luis Bunuel),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등과 함께 마드리드 아방가르드 그룹에 합류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현대 미술의 양식을 시도하다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저술들을 보며 초현실주의 작가로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루이스 브뉴엘은 영화 감독으로 달리와 함께 1929년 단편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Un Chien Andalou)>를 만들어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는데, 이 영화는 초현실주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브뉴엘은 또한 1950년 <로스 올비다도스(Los Olvidados)>로, 1961년 <비리디아나(Viridiana)>로 각각 칸 영화제 감독상과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1972년과 1973년에는 아카데미상까지 거머쥔 명감독이다. 달리와 부뉴엘이 공동으로 만든 <안달루시아의 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 속에서 기존의 관습과 문명에 대한 거부와 조소를 날리는 아방가르드 영화의 대표작이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급진적이고 보기 불편한 장면들(에를 들어 안구를 면도칼로 긋는다든지, 손바닥의 구멍에서 개미들이 들긇으며 기어 나오는 등)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 주고, 감독에 대한 살해 위협과 주연 배우의 자살 등 많은 화제와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이후 초현실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 프랑스의 시인이자 작가로 초현실주의자 선언을 발표)에 의해 초현실주의 그룹에 몸을 담게 된 달리는,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환각적인 이미지를 얻는 '편집광적 비판'이라는 방식을 고안하였고, 이때 <기억의 지속>, <성적 매력의 망령-리비도의 망령(Specter of Sex Appeal)> 등의 작품을 그린다. 달리는 엘비스 프레슬리(Elvis , 존 레논, 데이비드 보위, 앨리스 쿠퍼 등의 가수들과 파블로 피카소와도 친분이 많았으며,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존경하기도 했다. 달리는 생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여러가지 상업적인 디자인이나 영화를 제작하는 등의 다양한 작업을 이어 온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많이 먹는 사탕인 추파춥스(Chupa Chups) 1969년 데이지 꽃 모양 디자인이다.
이 추파춥스의 추파(Chupa)는 스페인어 'Chupar'가 '빨다'라는 의미의 단어라는데 착안된 이름이며, 스페인의 추파춥스 컴퍼니에 의해 크게 성공한 브랜드이다.
이러한 달리의 대표작 중 사람들의 기억에 많이 남는 그림이 바로 맨 앞에 소개한 1931년작 <기억의 지속(The Persistence of Memory)>이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은 두통에 시달린 달리가 친구들과 극장에 가기로 한 약속이 있었지만 아내인 갈라만 보내고 집에 혼자 남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달리의 두통 때문에 시계가 흐늘거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기억의 지속>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뉴욕에서 전시를 할 때 처음 소개되었고, 달리는 이 전시회를 통해 미국 등 세계적으로 유명해진다. 사실 이 그림은 24.1cm x 33cm의 아주 작은 유화이다. 현재 이 그림은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데, 드물게도 1934년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익명의 사람이 기증한 것이다.
이 그림과 관련하여, 그림 속의 물렁물렁한 시계가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도 생각되는데, 달리가 생전 자신이 존경하는 당대의 인물이 프로이트와 아인슈타인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런 해석이 이해된다. 또한 이 그림 중 누워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을 흔히 달리의 자화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그림의 이미지는 달리의 고향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개미로 뒤덮힌 시계는 죽음을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이 시계는 현실세계의 시계와는 달리 녹아 내리는 듯한 모습이며, 이것이 달리 자신의 무의식, 억눌린 욕망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시간이 멈춰버린 권태로움, 영원한 삶에 대한 염원을 뜻한다고 할 수도 있다. 무의식이나 꿈에서는 시계나 시간이란 것이 소용없고, 무의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무의식은 의식하거나 지각할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에 해석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달리의 <기억의 지속>은 <기억의 영속성>이라고도 하고, <기억의 고집>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현대에 있어 이 그림은 여러 가지 패러디를 낳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심슨(The Simpsons)나, 세서미 스트리트의 시즌6에 등장하는 프랑스 화가의 이름이 "살바도르 다다(Salvador Dada)"인 것, 루니툰의 만화에서 벅스 바니와 대피 덕의 추격전에서 등장하는 등 많은 패러디가 이루어진 바 있다.
어째든 이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상은 시계이다. 그래서 혹자들은 단순히 "시계(Clock)"이라고 지칭하기까지 한다. 그러면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시계는 최초 해시계나 물시계, 모래시계 등이 사용되어 오다가, 최초의 기계적인 시계는 언제 누가 발명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기계식 시계는 탑에 설치된 시계로 알려져 있고,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리는 시계는 1335년 밀라노에서 제작된 것이 최초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것들은 시계이지만 아주 큰 기계에 해당하고, 스프링으로 작동되는 소형의 시계는 독일의 자물쇠 수리공인 헨라인이 1500년 경 만들었다. 이것이 최초의 휴대용 시계였다. 시계를 뜻하는 'clock'은 종(鐘)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후 시계의 발전은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1800년대 중반부터 그 중심이 스위스로 옮겨가기 시작한다. 스위스의 C. E. 기욤이란 사람은 1920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기도 했는데, 그가 온도변화에 대해 신축이 적은 인바(invar)와 탄성변화가 적은 엘린바를 발명하여 시계의 정확성을 크게 높인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이다.
시계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것은 처음 손목시계가 나왔을 때는 팔찌와 비슷하게 생각하여 여성들의 전유물로 생각했었는데, 이후 군인들의 필요성에 의해 손목시계를 착용하게 되어, 남성들도 손목시계를 사용하게 된다는 점이다. 처음 손목시계(회중시계 같은 것은 그냥 손에 묶도록 하는 방식이 아닌 현대와 같은 형식의 손목시계를 말한다)는 1904년 비행사인 알베르토 산토스 뒤몽(Alberto Santos-Dumont)이 한 손에는 회중시계를 다른 한 손으로는 비행기 핸들을 쥐고 운항하다가 이것이 불편하여 프랑소와 카르티에에게 새로운 시계를 개발해 달라고 하는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시계가 바로 카르티에의 산토스(Santos) 시계(아래 사진 참조)이다. 시계의 역사는 이후 스위스를 중심으로 발전되고, 현재도 스위스는 고급시계의 본산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최고급 시계의 이미지를 버리고 중저가 시계를 공략한 브랜드가 바로 스와치(Swatch)이다. 1884년 창업한 스와치는 그 동안 스위스의 수공업적 최고급 시계를 버리고 전자식 기술과 플라스틱 재질을 과감하게 사용하여 값싼 시계로 승부를 건다. 시계를 패션의 한 형태로 만든 것이다. 승승장구하던 스와치는 이후 오메가(Omega), 브레게(Brege), 론진(Longine) 등의 스위스 명품 시계 브랜드를 사 들여 시계 왕국으로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스와치가 미국의 리테일러(retailer) 회사인 타겟(Target)과 소송을 한다. 스와치는 타겟이 자신의 시계 디자인을 카피하여 판매했다고 주장하며, 2014년 미국 뉴욕에서 소송을 제기한다. 문제가 된 제품은 "지브라(Zebra)" 시계와 "멀티-컬러(Multi-Color)" 시계였다. 스와치는 이 시계들의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를 침해했고, 불공정 경쟁행위를 하였다고 주장한다. 스와치는 타겟이 디자인은 베낌으로써 소비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열등한 품질의 제품을 판매함으로써 자신의 명성에 훼손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타겟은 이러한 판매행위를 중지하고, 그동안 판매에 따른 이익을 손해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트레이드 드레스는 무엇인가?
트레이드 드레스란 지식재산의 한 형태로, 상표(trademark)와 유사한 면이 있다. 제품의 디자인이나 포장, 또는 색깔이나 형태 등이 특정한 출처(생산 또는 판매자)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소비자가 인식할 수 있다면 이를 보호해 줄 가치가 있다는 취지이다. 만일 이러한 보호가 없다면 트레이드 드레스의 소유자에게 피해가 발생할 뿐 아니라,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혼동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소비자와 시장의 질서를 위해서도 이러한 소비자의 신뢰를 보호해 주는 것을 말한다. 트레이드 드레스는 "바로 보고 느낌(look and feel)"으로 인식되고, "전체적인 인식(overall look)"으로 판단한다. 즉 한번 쓱 보고 어떠한 출처(제조사 또는 판매사)의 제품이아 서비스인지 인식이 되는 정도하면 보호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개념이며, 우리나라에서는 트레이드 드레스를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불공정 거래행위가 될 가능성은 있다. 미국에서 트레이드 드레스는 등록할 수 있으나, 설령 등록하지 않아도 보호될 수 있다. 물론 등록을 하는 것이 소송에서의 입증에 유리하기는 하다.
스와치가 주장한 트레이드 드레스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얼룩말 무늬 시계(Zebra Watch)와 멀티 색상 시계(Multi-Colored Watch)이다. 이 시계들은 오랫동안 스와치가 시장에서 확립한 스와치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굳혀 온 제품이므로 트레이드 드레스에 의해 보호되어야 한다는 것이 스와치의 주장이었다. 이후 소송은 스와치와 타겟이 원만하게 합의를 함으로써 종료하게 된다. 합의의 조건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타겟이 손해를 배상하고, 더 이상 해당 제품을 판매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면 이제 시계와 관련한 다른 소송을 보자. 이번에는 스위스 철도와 애플(Apple)사의 소송이다.
애플은 2012년 스위스 철도의 운영사인 SBB로부터 상표권 및 저작권 침해 소송을 당한다. 이 소송의 발단은 2012년 애플이 아이폰 6를 출시하면서 시작된다. SBB가 소송에서 주장한 부분은 자신이 보유한 디자인은 1944년 엔지니어이자 디자이너인 한스 힐피커(Hans Hilfiker)가 디자인한 것이고, 이 시계 디자인을 아이폰 6 및 아이패드가 베꼈다는 것이었다.
SBB는 이 디자인의 시계를 각 역마다 설치하고 있었으며, 관련한 상표권을 확보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이 디자인을 "주걱 다이얼(scoop dial)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빨간 초침을 보면 끝 부분이 둥그렇게 디자인되어 주걱같이 생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시계 디자인은 런던 디자인 박물관(London Design Museum)과 뉴욕의 현대박물관(MoMA)에서도 훌륭한 20세기 디자인의 예로 소개되고 있었다. 스위스의 시계회사 몬데인(Mondaine)은 1986년 이래 이 디자인에 대해 라이선스를 받아 시계를 생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애플의 아이폰 시계도 거의 유사한 디자인을 채택하고 있었다. 아래의 시계를 보면 SBB의 시계 디자인과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결국 애플은 SBB와 합의하여 SBB의 시계 디자인에 대해 라이선스(license)를 받기로 하고, 2,100만 달러(약 227억원)를 SBB에 지급하기로 하였다. 애플은 시계 디자인을 카피함으로써 이미지에 타격을 입게 되었고, SBB는 "우리의 시계 디자인을 채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며, 스위스 시계의 디자인을 더욱 더 알릴 수 있었다.
바야흐로 현대는 디자인의 시대라 할 수 있다. 기술과 기능이 큰 차이가 없다면, 소비자에게 강력하게 어필할 수 있는 것은 디자인이 아닐까? 이를 반영하듯이 2011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페이스북(Facebook)은 소프트웨어 및 인터랙션 디자인 전문기업인 소파(Sofa)와 캐나다의 디자인 전문기업인 티한+락스(Teehan+Lax)를, 2012년 구글(Google)은 제품 디자인 전문기업인 마이크앤마이크(Mike&Maaike)와 2014년 핏빗(FitBit)을 디자인한 게코 디자인(Gecko Design)을,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인 액센츄어(Accenture)는 디자인 컨설팅 회사 피요르드(Fjord)와 2014년 호주의 디자인 회사인 리액티브(Reactive)를, 같은 해 또 다른 컨설팅 회사인 딜로이트(Deloitte)는 디자인 전문 기업 반얀 브랜치(Banyan Branch)를, 역시 컨설팅 회사인 PwC와 맥킨지(McKinsey) 및 언스트 앤 영(Ernst & Young)은 제품 디자인 전문 기업인 루나 디자인(Lunar Design)과 뉴질랜드의 디자인 전문기업 옵티멀 익스피리언스(Optimal Experience) 및 디자인 전략 컨설팅 기업인 세렌(Seren)을 각각 인수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 전문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은 이를 반증한다. 테크(technology) 기업의 경쟁력도 이제는 기술적 우위만으로는 어려운 상황이 되어 가고 있으며, 고객 경험의 차별화가 기업의 중요한 경쟁력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디자인, 저작권, 상표권 및 트레이드 드레스 등의 지식재산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