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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사가지가 없다

by 캡선생


제목의 사가지는 싸가지의 오타가 아닌 네 가지를 의미하는 사(四) 가지다.


좋은 글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단 하나의 정답은 없을 것이다. 글의 의도에 따라, 독자에 따라, 시대에 따라 좋은 글의 기준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다양한 의견 중에서 본인만의 정답을 찾아야 할 것이고, 그것이 어찌 보면 글쓰기의 목표이자 글쓰기 그 자체일 수도 있다.


다산 정약용이 말한 '독서-초서(독서한 내용의 핵심을 베끼는 행위)-저서(나만의 글을 쓰는 행위)'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레 좋은 글쓰기를 체득할 수도 있고, 글쓰기 책을 통해 직접적으로 좋은 기술을 배울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독자의 '좋아요'와 '댓글'을 통해서도 좋은 글쓰기의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방법과 과정을 통해 사가지가 없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나만의 잠정적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정확히는 네 가지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것이 좋은 글쓰기의 기초라는 것을.



1. 주어


초등학교 때 나의 글쓰기는 말 그대로 '나'의 글쓰기였다. "나는 밥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기분이 좋았다."와 같이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했고 느꼈는지를 문장마다 밝혔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학생의 매우 '사'적인 일기에 담임 선생님이 '공'적인 피드백을 주는 신기한 문화가 있었는데, 선생님이 바뀌어도 나에게 주어지는 피드백은 늘 비슷했다. '나'라는 주어를 매번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쓰지 않아도 '너'가 썼는지 알 수 있다고 말이다.


지금 와서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초등학생이었던 '나'로서는 불가능한 말처럼 들렸다. 주어가 없는 문장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내가 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읽는 사람이 누가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이건 마치 래퍼에게 'yo'를 빼고 랩을 하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는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가끔 친구의 일기를 보게 될 때면 예외 없이 '나'로 가득한 글을 보았으니 말이다. 어린아이의 '나'에 대한 집착은 글쓰기보다 말하기에서 더욱 생생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그냥 "라면 먹고 싶어요"라고 말해도 될 것을 "영희는 라면 먹고 싶어요"와 같이 '나'라는 주어를 넣는 것으로도 모자라 본인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집어넣는다.


물론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 간에도 이렇게 주어를 강조하는 특수한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성인이 되면 대부분 말하기에서 주어를 자연스럽게 생략한다. 그러나 글쓰기는 의식하지 않으면 아이 때의 버릇이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나 또한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수많은 '나'가 글 속에 존재했다. 어쩌면 글에서 가장 많은 단어는 '나'였을지도 모를 정도로. 이제는 의식적으로 이러한 '나'뿐만 아니라 '너', '그(녀)'와 같은 주어가 필요 없을 경우에는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2. 들들들


대학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영어통번역을 4년가량 했기에 영어로 쓰인 책을 한국어 책 보다 많이 읽었다. 그러다 보니 한국어로 말하거나 글을 쓸 때도 가끔 영어스럽게 표현한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또한 내가 쓴 글이 번역서 같다는 평도 가끔 들었다.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들들들', 즉 복수형의 단어를 쓰는 데 있었다.


영어에서는 단수냐 복수냐가 매우 중요하다. 그에 따라 동사와 명사의 형태가 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어의 특성을 의식적으로 익힌 것이 모국어에도 강한 영향을 끼쳤다. 한국어의 단어는 영어처럼 단복수의 개념을 엄밀히 적용할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히려 '들'과 같은 표현은 불필요한 경우가 더 많다.


의존 명사 '들'은 한자어로 치면 '등(等)'에 해당한다. 사전에는 이렇게 설명돼 있다.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나열할 때, 그 열거한 사물 모두를 가리키거나, 그 밖에 같은 종류의 사물이 더 있음을 나타내는 말"

그만큼 우리들 문장에서 복수를 나타내는 접미사 '-들'은 조금만 써도 문장을 어색하게 만든다.

예) 모든 아이들이 손에 꽃들을 들고 자신들의 부모들을 향해 뛰어갔다. -> 모든 아이가 손에 꽃을 들고 자기 부모를 향해 뛰어갔다.

- 김정선의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유유, 2016) 중 -
* 일부 편집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의 저자 김정선은 이렇게 '들'을 지나치게 붙인 글이 재봉틀의 '들들들' 거리는 소음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러한 지적을 접하고나서부터는 내 글에 이러한 소음이 없는지, 있다면 최소화할 수 없는지를 살피곤 한다.


3. 접속사


김훈의 <칼의 노래>라는 소설을 자세히 살펴보면 접속사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00쪽에 달하는 장편소설에 접속사를 찾기 힘들다니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운 일이다. 나의 짧은 글 한 편에도 접속사가 DMZ에 매설된 지뢰처럼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었는데 그의 장편 소설은 티끌하나 없는 실크로드 같았다. 마치 접속사라는 바퀴를 하나 더 달아서 세발자전거를 힘겹게 타는 나의 옆으로 접속사를 다 제거한 외발 자전거를 능숙하게 타는 누군가가 '쌩'하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기존에 쓴 글을 모아 브런치북을 발간할 때마다, 내 글에 접속사가 얼마나 많은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데 예상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접속사에 당황스러웠다. 외발 자전거는 타지 못하더라도 이제 두 발 자전거는 타야 되지 않겠냐라는 생각에 접속사를 최대한 거두어보았다. 이 과정에서 내가 느낀 점은 조금만 더 깊게 생각을 하고 더 정성 들여 글을 쓴다면 상당수의 문장은 접속사 없이도 충분히 연결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접속사의 과다는 작성자의 태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4. 사족


앞서 말한 1, 2, 3번을 종합하면 사족을 없애자는 이야기다. 다만 사족을 4번으로 따로 떼내어 이야기하는 이유는 내용에 있어서도 사족을 없애자는 취지다. 뱀을 그릴 때 발을 그려 넣을 필요가 없듯이 글에도 불필요한 내용을 적을 필요가 없다.


과학에서는 오캄의 면도날(Occam's Razor)이라는 개념이 있다. 네이버 지식 백과의 정의에 따르면 '어떤 사실 또는 현상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을 뜻하는 개념이다. 실용적인 글쓰기에도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글이 독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다가갈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으로 수정해서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다비드상을 조각하고 나서 말한 "다비드를 조각할 때 다비드가 아닌 것만 제거했다"와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말한 "Less is better(줄이면 풍부해진다)"를 명심한다면 글에서 사족이 위치할 자리는 없을 것이다.



이 글에는 여전히 불필요한 사가지가 있을 것이다. 사가지가 없는 글은 나에게 이미 이룬 성취가 아닌 나아갈 목표이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좋은 글에 대한 생각은 사람마다 다르니 이 글에 동의하지 않는 분도 있을 것이다. 다만 글에 동의를 하는 분이라면 사가지를 기준으로 본인의 글을 검토해 보면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본인만의 좋은 글쓰기에 대한 기준을 다시금 생각해 보면 좋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일단 사가지 없는 작가가 되려고 한다.


Photo by ADESH SRIVASTAV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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