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1. #아사멸 _상
입안 깊숙이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고, 시린 봄기온이 몸을 감쌌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따스해야 할 봄인데 어째서. 피부가 느끼는 냉감이 이렇게 날카로울 줄은 몰랐다. 오래간만에 꺼내 입은 진녹색 재킷을 만지며 생각했다. 너무 가볍게 입었나. 그렇지만, 재킷은 내가 유일하게 '새것처럼 보이는' 옷이었다.
나는 생각의 고리를 끊고 다시 낯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쪽일까?
아무리 걸어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이라, 내 옆을 지나가는 헤드셋을 낀 남자를 붙잡았다.
“저기, 입학식에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하죠?”
그는 나를 보며 잠깐 멈칫했다. 마치 내 얼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재킷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에 손을 비비며 나는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입학식이요. 어디로 가야 하죠?”
“아.”
남자는 헤드셋을 한쪽 귀에서 떼며 천천히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정확히 내가 가던 반대 방향이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던 찰나, 남자는 다시 헤드셋을 끼고 몸을 돌렸다. 나는 남자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다 보니 나는 남자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또 어쩌다 보니 남자의 뒤에 섰다.
‘2030학년도 신입생 입학을 환영합니다’ 커다란 현수막 위로, 저마다 과 위치를 알리는 드론이 빛을 내며 하늘을 돌아다녔다. 그 아래 나무와 나무사이에 걸린 현수막의 글씨가 바람에 펄럭였다.
차별 없는 대학. 나는 그 문구를 다시 한번 읽었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안심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확신이 들었다.
불과 두 달 전, 고등학교 졸업식 인파와는 비교도 안 되는 수많은 사람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다. 설렘반, 두려움반.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사이사이로 정의 못할 감정이 흘러들었다. 분명 이 사람들도 나와 같은 기분이겠지. 나 또한 이들과 다르지 않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까지, 부푼 핑크빛 꿈을 갖고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말로만 듣던 MT, 나를 이끌어줄 지도 교수님, 친하게 지낼 동기와 선배, 수없이 쏟아지는 과제, 동아리 활동, 그리고 틀림없이 생길 남자친구에 대해서.
사회복지과 1학년은 오후 1시에 소모임실 A에서 간단한 안내를 듣겠습니다.
공중 스피커에서 안내가 나오자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지정해 준 시간까지 딱히 할 일이 없던 나는 서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가만히 있기로 했다.
헤드셋을 낀 남자는 몇 걸음 떨어져 있었지만 여전히 내 시야 안에 있었다. 그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조금 있다 소모임실 A에 들어갔을 때, 다시 한번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는 그런 생각. 아는 사람도 없는 이곳에서 그는 내게 아주 작은 친절을 베풀어 주었으니까.
그러나 나완 다르게 그는 아는 사람이 있는 듯했다. 저 멀리 뛰어온 긴 생머리의 여자와 반갑게 인사하더니,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그 광경에 내심 서운했다. 한 번 말을 섞었다는 이유로, 나는 그에게 뭔가를기대한 모양이었다. 정신 차리자.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다시 고개를 들자, 헤드셋 남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같이 웃던 여자도 함께.
소모임실 A.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약속시간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사람과 사람 간의 예의라고 배웠으니까. 회색 문은 눈에 띄게 낡았다. 나는 끼익대는 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엔 이미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었다. 벽에 설치된 대형스크린을 기준으로 몇몇은 둘러앉았고, 또 몇몇은 간이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기요, 혹시 여기 1학년 안내...”
내 말은 끝까지 가지도 못했다.
웃음꽃이 피던 밝은 공간이 갑자기 암전 된 것처럼 정적으로 휩싸였다. 모두가 날 쳐다보긴 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눈인사도 없었고, 손짓도 없었다.
내가 불청객이라도 된 것처럼.
‘내가 잘못 왔나?’ 문에 걸린 네모반듯한 LED 팻말도 다시 확인했다. 소모임실 A. 확실했다.
다시 내가 들어오자, 또래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구석자리를 가리켰다.
“그냥... 저쪽 앉으세요.” 그녀의 말에 고맙다는 의미로 살짝 목례하며 자리에 앉았다. 기분이 묘했다. 그녀의 말이 꼭 내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된다는 ‘허가’ 같았다.
내가 자리에 앉자, 주변은 다시 소곤대는 소리로 채워졌다. 짧은 진동 소리에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학교엔 잘 도착했어?]
언니의 메시지였다. 나는 곧장 답장을 쳤다.
[응, 소모임실 A에 와있어.]
언니의 답장을 무료하게 기다리던 찰나, 헤드셋을 낀 남자와 긴 생머리의 여자가 들어왔다. 아는 얼굴의 등장에 약간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 저 남자에게 아는 체라도 하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태도도 괜찮아지겠지. 내게 도움을 줬던 그를 보며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그 순간,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나를 본체만체 지나쳐, 멀찍이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작은 ‘삑’ 소리가 났다. 생각과 감정이 일치하지 않을 때 흔히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였다.
통통.
그때, 옆자리에서 누군가 빈 의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냅백을 눌러쓴 여자였다.
“저기.”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준 사람이 나타났다.
나는 순간적으로 설렘과 반가움이 솟아올라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안녕.”
“어, 어... 나랑 동갑이지? 스무 살.”
“응, 맞아.”
“근데, 우리 과 챗방에 너 있어?”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스냅백을 쓴 여자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핸드폰 줘봐.”
나는 얼떨결에 핸드폰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화면을 몇 번 툭툭 터치하더니 다시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근데 뭘 한….”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스냅백을 쓴 여자는 이미 나에게서 몸을 완전히 돌려, 다른 사람들과 손짓을 섞으며 대화에 빠져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내가 끼어들 타이밍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까의 설렘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나는 다시 혼자였다. 언니가 종종 말하던 군중 속의 외로움이라는 게 바로 이런 거였구나.
징징징.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연달아 울렸다.
화면엔 ‘2030 사회복지과 챗방’이라는 낯선 알림이떠 있었다.
[아, 설명회는 무슨 설명회야. 그냥 공지 띄우면 되는 거지.]
[노잼]
[와씨ㅋㅋㅋㅋ 언제 적 단어냐?]
[창조주가 우리 나이 때?]
[스키니 입던 시절?]
[스키니는 완전 옛날이지ㅋㅋㅋ]
[고홈, 고홈.]
[공지-3분 뒤에 교수님 소개 영상 있겠습니다.]
[망함ㅋㅋ]
채팅방 속에서조차 나는 보이지 않는 투명인간 같았다. 인사라도 건네볼까 고민했지만 이미 타이밍을 놓친 후였다. 대신 아는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그것도 하나? 뭐더라, 우리 과 특별전형 소개.]
[http://기계인간. com]
[#장애인특별전형_ 이것도 맞을걸?]
[아, 그 반인반계?]
마침내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이거라면 자신 있었다. 조금 급한 손놀림으로 자판을 두드렸다.
[정식 명칭은 하프휴먼이야.]
순간 시끄럽던 채팅창이 조용히 멈췄다.
정적 후, 아주 짧게 한 단어가 올라왔다.
[쏘리.]
반인반계라고 했던 사람이 짧게 답을 달았다. 그게 끝이었다. 채팅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의미 없는 농담들로 넘쳐났다. 이게 뭐지? 이마에서 차가운 식은땀이 맺혔다. 주변을 슬쩍 둘러봤지만, 아무도 내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여전히 핸드폰 화면과 친구들과의 대화에만 빠져 있을 뿐이었다.
징징-.
하필 이 타이밍에, 얄밉게도 언니의 메시지가 울렸다.
[과 애들은 어때? 걱정돼서 물어봐. 요즘 애들 사이에 ‘아사멸’ 같은 게 유행이라던데, 동료가 알려주더라.]
아사멸?
처음 보는 단어였다. 나는 곧바로 검색창을 열어 낯선 단어를 입력했다. 단어 아래로 잔인하리만치 차가운 문장들이 떠올랐다.
[따돌림과는 다른 개념. 주로 자기보다 못하거나 결이 안 맞는 타인을 상대로 한다. 은근히 상대방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미세하게 무시하고 깔보는 아주 사소한 멸시.]
나는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러니까 이건…
삑. 삑. 삑. 경고음이 아까처럼 머릿속에서 연속으로 울렸다. 내가 방금 읽은 건 단순한 단어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의 나를 설명하는 문장이었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았고, 그 누구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조금씩 나를 지워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