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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ppa Jun 30. 2023

홍콩 - 무선 이어폰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수용에 대해서


  어느 날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이어폰을 가져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닫는다. 가방 깊숙한 곳으로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저어 봐도 잡히는 것이 없다. 아, 이런. 낭패다. 


  이동 중에 음악을 듣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최신 가요, 재즈, 팝송, 가끔은 기타 연주나 클래식까지 다양하게 듣는 편이다. 사실 어떤 음악을 듣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추구하는 것은 잠시나마 바깥 세상과의 단절이다. 사람들의 대화와 소음을 차단하고, 멍하니 창 밖의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껏 공상, 상상, 몽상 속으로 빠져든다. 짝사랑하는 선배와 연인이 될 수도 있고, 그럴 싸한 발명을 통해 갑부 반열에 오르기도 하고, 최근 다녀온 여행지로 다시 떠나며, 훨씬 단순하게는 그저 저녁으로 뭘 먹을까 고민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허무맹랑한 공상에 불과하지만 범람하는 정보와 무선 인터넷 기술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나와 내 생각에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이다. 주변을 잊어버리고 골똘히 몰두해 있다 보면, 마음을 짓누르던 스트레스도 어느 순간 사그라든다. 

  '콩나물'이라는 조롱도 잠시, A사에서 출시한 무선 이어폰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손 안에 쏙 들어오는, 하얗고 매끄러운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들었다. 디자인에 끌려 A사의 플래그십 스토어에도 몇 번 방문했지만 한참을 만지작거리다 결국 그냥 돌아섰다. 나는 유독 유선 이어폰이 좋았다. 물론 아무렇게나 가방에 쑤셔 박은 줄이 매번 꼬여서 귀찮고, 조깅이라도 하려면 손에 스마트폰을 쥔 채로 뛰어야 했지만, 충전할 필요도 없고 잃어버릴 가능성도 훨씬 적었다. 한 번 써보면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어. 확신에 차서 추천하던 친구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정말 그렇게 될까 봐. 나에게 이동 중 음악을 듣는 행위는 무의식에서 우러나온 습관이고, 그래서 자연스러우며 그래서 더 광활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 충전을 하면서 습관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무심한 충동에서 싹트는 창의성이 기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망설여졌다. 

  우습지, 고작 이어폰 하나에 그렇게 심각한 고민이라니. 하지만 상상력은 창조의 시발점이라고 조지 버나드쇼가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당신은 원하는 것을 상상하고 상상하는 것을 행동에 옮길 것이며, 종국에는 행동에 옮길 것을 창조하게 된다'. 

  물론 홍콩에서 우연히 A사의 새로운 무선 이어폰 모델을 접한 뒤 모든 다짐은 수포로 돌아가 버렸지만. 


  내 기억 속 홍콩은 2006년, 도시를 처음 접했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1997년에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고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던 때라, 길거리에선 푸퉁화(普通话, 표준 중국어)보다 광동어가 훨씬 더 많이 들렸다. 중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나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늘 잊혀지지 않는 향수를 품고 있다. 가끔 본토에서 홍콩으로 여행을 온 듯 한 중국인 관광객 무리가 지나가다가 푸퉁화가 들리면 반가울 지경이었다. 호기심에 호텔이나 식당에 들를 때마다 푸퉁화로 말을 걸면, 외국인인 나보다도 어색한 발음의 답변이 되돌아왔다. 시원한 밀크티를 마시러 들렀던 한 카페에서는, 푸퉁화로 말을 걸자마자 주인이 고개를 저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잉글리시 오어 칸토니즈(광동화의 영어식 표현) 온리.”

  이방인을 바라보듯 사뭇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다.

  

  나는 그 시절 홍콩을 참 좋아했다. 단순히 여행 초보에게 잘 맞는, 재미있는 여행지라서는 아니었다. 물론 홍콩은 여행하기 참 좋은 도시다. 혼자서든 친구와 함께이든. 도시 곳곳에 볼거리가 넘쳐난다. 피크 트램과 눈부신 야경, 흥미로운 역사를 그대로 담은 박물관, 다채로운 사원과 유명한 맛집들. 바다는 또 어떤가. 홍콩은 섬도 많고 해변도 많다. 물놀이를 썩 즐기진 않지만, 도시 곳곳에서 해변을 만날 수 있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여행지에도 또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느낌이라서.   

  그러나 홍콩의 매력은 단순히 여행지로서의 흥미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좋은 의미로, 그 시절 홍콩은 ‘잡탕밥’ 같았다. 거리마다 다양성이 넘쳐흐르다 못해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펄떡였다. 손을 뻗으면 무지개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소호 벽화 거리의 레스토랑과 카페에는 그야말로 총천연색의 인종을 볼 수 있었다. 테이블을 하나 두고 마주 앉은 두 명의 머리카락, 눈동자, 피부색이 서로 달랐다. 열린 창문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는 각국의 언어들이 마구 뒤섞여 흘러나왔다. 덥고 습한 공기 중으로 온갖 언어의 문장이 흩날려 가뜩이나 무거운 공기가 더 끈적해졌다. 홍콩의 길거리를 거닐 때마다 ‘회색소음’이 나를 감싸고 있는 듯 했다. 

  중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발전한,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에 걸린 붉은 색과 황금 색의 한자 간판이 어지러웠다. 당시 아시아에선 흔하게 볼 수 없던 런던식 2층 버스가 지날 때마다 빌딩 벽에 닿을 듯 아슬아슬하게 우회전 하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았다. 좌측 통행이 익숙치 않은 보행자에게 길을 건널 땐 오른쪽을 보라며 바닥에 적혀 있는 ‘望右 (Look Right)’ 한자와 영어 병용 표기가 곰살궂었다. 

  그렇게 일주일 남짓한 짤막한 여행을 다녀온 뒤 나는 홍콩에 푹 빠져버렸다. 홍콩이 참 좋았더라고 말하면 친구들이 ‘뭐가 그렇게 좋았는데?’라고 으레 되묻곤 했다.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해 봐도 한 단어로 딱 규정지어 얘기할 순 없었다. 1842년 8월 29일 난징 조약으로 인하여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으나 중영공동선언을 거쳐 일국양제 시행에 합의 후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로 편입되었다는, 한 마디로 요약하기 어려운 홍콩의 역사처럼 태생적으로 어쩔 수 없는 복잡함, 다양성, 있는 그대로의 공존, 그리고 관용. 나는 그 시절 홍콩 특유의 ‘혼돈의 질서’를 사랑했다. 


  2019년, 아주 오랜 만에 홍콩을 다시 찾았다. 그리고 다시 찾은 홍콩은 기억 속 모습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어지러운 도시 풍경과 화려한 야경은 그대로였지만, 공기부터 달라졌음을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중국 정부가 꾸준히 펼쳐온 '하나의 중국' 운동은 수 많은 중국 본토인을 홍콩으로 이끌었고, 홍콩은 점차 중국화되었다. 거리 곳곳에는 시끄러운 중국인 관광객들이 넘쳐났다. 이제 어딜 가도 영어보다 푸통화가 더 흔하게 들리고, 호텔이나 식당 뿐만 아니라 길거리 가판에서도 푸퉁화로 쉽게 소통할 수 있었다. 거시적인 관점에서도 사실상 일국양제가 붕괴하고 홍콩은 중국 정부에 강제적으로 예속되었다. 홍콩을 탈출해 영국으로 떠나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고, 홍콩에 둥지를 튼 다국적 기업들도 사무소를 폐쇄하거나 상주 인력을 줄였다. 자연스럽게 홍콩에 거주하던 외국인들도 떠났다. 마치 음악처럼 서로 다른 언어가 뒤섞여 들리던 소호의 길거리를 중국인 관광객과 푸통화가 채웠다. 

  중국 정부가 칭하이성과 티베트(시짱)를 연결하는 칭짱철도를 깔았고, 이 철도를 통해 중국 자본과 한족들이 속속 유입되면서 티베트의 중국화가 가속화되었던 것 처럼, 그리고 이러한 한족 이주정책과 강제적인 동화로 티베트 고유의 독자성이 시나브로 퇴색된 것처럼. 홍콩도 중국 본토의 색깔이 짙어지면서 고유의 다양성을 잃었다. 내가 좋아했던 고기 국수를 파는 식당, 런던식 버스, 마천루와 어지러운 간판, 하물며 해변도 그 자리에 그대로였지만 과거의 생기나 매력은 온데간데 없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품고, 후덥지근한 더위를 피하려 들렀던 A사의 플래그십 스토어에서 새로 나온 무선 이어폰 모델을 마주했다. 기존 세대와 달리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추가되었다며 점원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 때만 해도 여전히 구매할 의향이 없었다. 하지만 권유에 못 이겨 이어폰을 귀에 꽂은 그 순간, 바깥 세상과 완벽히 단절되는 그 느낌에 마음을 뺏겨버리고 말았다. 분명히 플래그십 스토어 한 가운데, 수 많은 인파 틈에 서 있는데 단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에 덩그러니 홀로 남은 기분이었다. 어디서든 나만의 시공간을 만들어주는 경험, 그 가치에 끌려 홀린 듯이 무선 이어폰을 구입했다.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이토록 강력할 줄이야. 

  이어폰을 구매하고 나와 코너의 작은 카페에 앉았다. 아무런 음악을 틀지 않고 무선 이어폰을 꽂은 채 노이즈 캔슬링 기능을 켰다. 카페 앞에는 아이들이 뛰어오는 작은 운동장이 있었는데, 햇볕 아래 땀을 흘리며 신나게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 편의 무성 영화를 보고 있는 듯 했다. 바로 그 순간에, 거스를 수 없는 변화와 수용에 대해서 생각했다. 아날로그 시대에 대한 그리움과 그 방식을 유지하고 싶은 향수는 얄팍한 편의 앞에서 무너진다. 기술의 발전 앞에서 어쩔 수 없는 전환이며, 한낱 개인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홍콩의 살아 숨 쉬던 다양성이 중국 정부의 강력한 '하나의 중국' 운동과 자본주의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 앞에서 결국 빛을 잃듯이.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온 뒤 그 시절 홍콩을 느낄 수 있다며 찬호께이의 <13.67>을 추천 받았다. 소설은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작가의 수려한 글솜씨 덕분에 마치 홍콩 시내 한 복판에서 사건을 접하는 듯한 생동감을 느끼며 글을 읽을 수 있다. 끝없이 솟은 마천루, 쉴 새 없이 사람들이 오가며 온갖 먹을 거리를 파는 번잡한 거리, 영국인과 홍콩인, 아니 전 세계 인구가 뒤섞인 생활 환경까지, 책장을 넘길 때 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홍콩이 눈 앞에 강렬하게 되살아난다. 홍콩에서 나고 자랐지만 현재는 대만으로 거처를 옮겨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찬호께이는 <13.67>을 통해 과거의 홍콩을 그리고 싶었다는데, 그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추리 소설이라는 매개체 안에 고향을 향한 작가의 그리움이 어찌나 진하게 묻어나는 지, 책을 읽는 동안 과거 홍콩에 대한 향수라는 공통점을 통해 작가와 마음이 이어진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오면 숨 쉬듯 자연스럽게 이어폰 케이스를 충전기에 꽂는다. 걱정만큼 공상의 자유와 창의성이 줄었을까. 모르겠다. 잠깐 고민했을 지 모르나 어느 새 잊어버렸다. 어차피 현실의 편의와 단절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면, 내가 잃은 것보다 얻은 것에 집중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더 좋을 테니까.   

  다만 아직도 무선 이어폰을 바라 볼 때마다 2006년과 2019년의 홍콩을 떠올린다. 아마도 당분간 홍콩에 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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