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의 가슴 시린 청명한 공기와 맑은 풍경은 내 가슴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이다. 핀란드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의 "겨울 하늘"은 핀란드에서 느꼈던 내 모든 기억과 맞닿아 있다. '겨울날의 핀란드'는 그 자체로 완전한 형상이다. 그때 내가 직접 보고 겪은 투르크와 헬싱키의 아름답고 해맑은 자연은 이 곡이 들려주는 차갑고 순수한 음향과 닮았다. 짧은 곡이지만 현의 차갑고 시큰한 보잉 위로 하프와 피아노 선율의 숨결이 어우러지며 몽환적이면서 깨끗한 코다로 마무리 됐다. 핀란드 지휘자 린투의 해석은 역시 자신의 모국에 대한 강렬한 사랑으로 가득했다. 핀란디안 음악은 뼛속까지 핀란드 고유의 정서를 담아내는 듯하다. 그 나라의 대자연과 마주하면 당신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시벨리우스의 음악이 어찌하여 그토록 차갑고 깨끗할 수 있는지 핀란드의 자연환경이 모든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J. 브람스ㅣ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리니스트 크리스티안 테츨라프는 서울시향과 오랜 관계 속에서 늘 호연을 들려줬던 연주자이다. 1악장 긴 도입부 이후 바이올린 첫 독주부는 역시 테츨라프적인 보잉으로 시작된다. 그가 들려주는 자유분방한 집시풍 보잉은 과연 독일 연주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가 이전에 만프레드 호네크와 서울시향과 협연했던 <베토벤 바이올린 협주곡>과는 또 다른 스타일의 연주이다. 일반적으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은 꾹꾹 눌러 담는 굵직하고 강인한 해석이 대세를 이루지만 오늘 그의 연주는 강력하나 가볍고 불꽃이 튀나 지나치게 자유로운 연주를 지향하고 있다. 반면 한누 린투와 서울시향의 서포트는 깊고 단단하다. 마치 서로가 물과 기름처럼 고르게 뒤섞이지는 않지만 각자의 존재감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출하는 느낌이 그리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다. 분명 전통적인 방식의 브람스를 선호한다면 난감하고 거부감이 들 수 있는 연주임을 부정하긴 어렵겠으나 테츨라프 특유의 짧게 끊어치는 보잉을 좋아하는 이라면 대단히 흥미롭고 색다른 브람스를 경험하는 것이리라. 특히 카덴차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테츨라프 보잉의 특징은 당장 공연장을 뛰쳐나가고픈 마음이 들다가도 그만의 애절함 속에 어느 순간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음악예술의 세계'는 결코 정해진 답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리라. 1악장이 끝나고 객석에선 박수가 터져 나온다. 이건 분명 테츨라프 지지자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극한 낭만주의 음악을 들려주는 2악장은 사뭇 다른 소릿결로 응수하는 그의 보잉이 새삼 놀랍다. 여전히 자유로운 영혼의 버릇(?)이 작품 곳곳에서 불쑥 튀어나오지만 이 또한 지지자의 입장에선 쾌감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저돌적인 3악장은 가장 그의 스타일에 부합하는 순간이다. 강약의 감각적인 컨트롤과 깊고 섬세한 기능성, 오케스트라를 압도하려는 무모함과 이기적인 욕심이 만나 뜨겁고 치열하게 반응하는 이들의 연주는 오롯이 지지할 수 없는 새로운 시도이지만 뻔함을 거부하는 진취적인 행동은 오히려 그의 악행(?)에 나도 공범이 될 수밖에 없음을 자백하게 만든다. 코다의 맹렬한 질주는 지극히 테츨라프적인 끝맺음이었다. 날렵하고 신경질적인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앙코르 <J. S.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라르고'>로 완전한 이분법적 변신을 보여줬다. 그야말로 분명하게 독일로 향하는 그의 음악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연주였다.
D. 쇼스타코비치ㅣ교향곡 15번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번>은 로시니, 바그너 음악을 인용한 작품으로도 이전의 곡과는 다른 독보적 독특함을 지닌 곡이다. 한누 린투는 7년 전 서울시향을 지휘했을 때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번>을 연주했는데 오늘은 마지막 교향곡을 연주한다.
이 교향곡은 다른 작곡가들과 자신의 작품 일부를 인용한 탓에 그만의 고유 정체성을 사정없이 뒤흔드는 느낌도 있지만 이는 단순한 면만 바라본 관점이라 생각한다. 자주 듣지는 않았지만 <교향곡 15번>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그 자체이다. 1악장에 <로시니 "빌헬름 텔" 서곡> 주제부가 여러 번 등장한다고 해서 무게감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이러한 시도가 작곡가 특유의 감각적인 수준에 놀라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 싶다. 2악장은 첼로 수석의 솔로 파트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불안과 어둠, 애절함이 뒤섞인 복합적 감성을 자아냈다. 최후의 교향곡으로서 지니는 장엄함은 웅장한 바그너적 요소도 담고 있는데 당연한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이 쇼스타코비치 음악성의 고유한 범위에서 온전히 스며들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전문 지휘자로서 명성이 있는 린투의 해석은 다분히 이런 부분들을 의식하고 있음이 곳곳에 드러난다. 모든 목관과 날카로운 현이 어우러지는 앙상블은 명징하고 깔끔하다. 이는 지휘자의 집요함이 서울시향에 온전히 접목되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4악장은 <바그너 "니벨룽의 반지">로 시작된다. 당연히 러시안풍 바그너는 아니지만 매번 들을 때마다 어찌 받아들일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당황할 틈도 없이 쇼스타코비치 본연의 세계로 돌아온다. 다시 바그너가 고개를 내밀지만 잠시 미소 지을 뿐이다. 어쩌면 이러한 인용의 활용은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에서 그의 독창적인 시도가 극점을 찍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됐든 쇼스타코비치 마지막 교향곡은 철저히 그답다는 점에서 작품의 인용 유무가 큰 이슈가 되지는 않는다. 바그너가 절묘하게 등장하면서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 범위가 무한대로 빅뱅을 이루었다고 본다. 피날레의 타악기군 앙상블은 환상적이다. 조용하게 마무리되지만 일사불란하면서 조직적인 혼연일체를 보여줬다. 이토록 수준 높은 연주를 한누 린투 지휘의 서울시향으로 듣게 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더구나 그동안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었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5번>을 오늘처럼 의미 있게 감상해 본 경험을 갖게 되어 새삼 행복한 순간이었다. 동시에 그동안 한누 린투를 그저 그런 지휘자로 느꼈던 과거를 반성하게 했다. 앞으로 서울시향 무대에서 그를 자주 만나볼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