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향악축제를 앞둔 지방 오케스트라는 그들이 상주하는 공연장에서 지역민들에게 미리 연주를 선보이는 과정을 반드시 거친다. 이는 그들의 '근본적 의무'이기도 하지만 보통은 '실황 중계방송을 겸한 서울 공연의 사전 리허설' 개념이 강하다. 최근 교향악축제의 흐름과 경향을 보면 예전과 완연히 달라졌음을 느낀다. 그야말로 '칼을 갈고' 나온다. 다른 지역 교향악단들과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비교의 무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지휘자와 단원들 모두가 그들의 자존심을 걸고 참여하는 것이다.
오늘은 부산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상임지휘자 최수열과 부산시립교향악단의 <말러 교향곡 9번>이 연주되었다. 6월 25일 교향악축제 폐막 공연을 앞두고 부산시민에게 그날 연주될 곡목을 미리 선보이는 것이다. 개인적으론 처음으로 부산에서 그들을 만났다. 서울보다는 부산에서 그들만의 말러를 직접 호흡하고픈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그 소망을 이루게 되어 감개무량하다.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2층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니 흡사 세종문화회관을 연상하게 한다. 부산시향 단원들이 모두 자리를 잡고 지휘자 최수열이 등장해 포디엄 위에 성큼 오른다. 오늘 연주에 큰 부담을 안고 있음이 그의 얼굴에 그려진다. 2016년 1월 16일과 17일, 정명훈을 대신하여 서울시향과 <말러 교향곡 6번>을 연주하던 그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벌써 7년이 지난 그날의 연주회는 최수열 자신에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순간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하늘이 내려준 기회였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의 그가 존재하는 이유도 '그날의 말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지휘봉이 서서히 허공을 가른다. 무거운 저음 현과 약음기를 끼운 혼이 어두운 서주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1악장은 <말러 교향곡 9번>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으로 연주의 성패가 결정될 수 있는 중요한 악장이다. 도입은 기대 이상으로 매끄럽고 확고했다. 부산문화회관 대극장 내부의 건조한 사운드가 귓가를 거칠게 자극한다. 이는 말러와의 대전에서 최수열과 부산시향이 싸워나가야 할 또 하나의 큰 난관인데 초반 우려와는 달리, 부산시향의 소릿결엔 윤기가 묻어 있다. 모이스처라이징(moisturerizing)된 앙상블에서 그들의 막대한 연습량을 짐작할 수 있었다. 기대 이상의 연주력으로 탄탄한 흐름을 보여준 순간은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다만 중반부에 약음기 낀 금관(트럼본 또는 혼)이 1, 2마디 급히 시작되는 제법 큰 실수가 있었고 차임의 등장도 첫 타격이 성급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지휘자의 비팅 문제였거나 단원 개인의 착각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리허설이 충분했기 때문인지 곧바로 정상적인 흐름을 되찾았고 불협화음과 어지러운 선율로 가득한 말러 음악은 정돈되고 가공되어 그들만의 손길로 가슴을 저미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입혀 나갔다. 목관과 금관의 극적인 대위 구조가 오묘한 조화를 이룬 후 피콜로의 귀여운 선율로 거대한 첫 악장은 종결됐다.
2악장이 시작되자 보다 안정감을 찾아가는 듯했다. 거대 1악장을 제법 무사히 마친 탓인지 확고한 자신감이 붙은 느낌이다. 특히 목관은 이전보다 훨씬 유려하고 깔끔한 소릿결을 들려준다. 아무래도 공연장이 이들의 사운드를 굳건하게 받쳐줬다면 깊고 고혹적인 소리가 났을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난' 속에서도 빛을 발했다. 1~3악장까지 다소 분위기가 산만하고 어지러웠던 점과 마디수를 잘못 세고 들어오는 실수는 남은 열흘의 기간 동안 리허설과 오늘의 소중한 실전 경험을 통해 충분히 보강될 것이다. 단순히 서울 공연을 대비한다기보다는 그들 스스로가 이보다 훨씬 높은 곳으로 크게 비상할 수 있다는 자각을 이뤄낼 수 있다는 의미가 더욱 크다.
오늘은 전반부 연주곡이 없어 3악장 시작 전 중간 입장이 있었는지 휴지부에 튜닝을 하며 잠시 쉬어가는 타이밍을 가졌다. 날카로운 금관 팡파르로 시작되는 빠른 3악장은 후반부의 폭발적인 총주부가 시작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팀파니의 첫 강타가 성급했던 것과 혼 파트의 음 이탈이 있었던 것 등을 제외하면 대체적으로 탄탄하고 진취적인 앙상블로 일관했다. 무엇보다 오늘 공연, 트럼펫 수석이 보여준 빛나는 대활약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시종일관 또렷하고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했던 그의 연주는 어쩌면 단원들 전체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우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혼과 트럼본 파트 역시 오늘 공연을 역동적으로 이끈 훌륭한 주역들이다. 큰 실수나 사고 없이 유려하게 앙상블을 견인한 그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4악장은 통렬하고 격정적인 현악 앙상블의 대향연이다. 최수열은 지휘봉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지휘했다. 이전의 3악장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순조롭게 버텨준 부산시향 단원들은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타오르는 피날레를 위해 온몸을 불사르는 투혼을 보여주었다. 소릿결의 울림통은 깊고 그윽했으며 응어리진 슬픔의 눈물을 쏟아내는 듯한 한(恨)이 서린 격렬한 보잉으로 관객들의 가슴 한 복판을 후볐다. 악장과 비올라, 그리고 첼로 수석, 이들이 보여준 안정적이고 명징한 소릿결의 솔로 연주도 잊을 수 없다. 또렷하게 내 귓가에 꽂히는 그들의 현악 솔로는 울컥한 충격을 안겼다. 후반부 목관 5중주 (오보에와 클라리넷, 바순, 플루트 2)로 이루어지는 실내악 앙상블의 사운드 융합은 실로 대단했다. 마지막 종착역인 코다에 이르자 현의 보잉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지휘자의 손끝은 떨림을 멈췄다. 그리고 1분이 넘는 숨 막히는 암흑과 침묵의 순간이 이어졌다. 어떻게 이런 기나긴 시간 동안의 침묵 악장이 가능했는지 지금 이 순간도 비현실적 공간에서 꿈속을 헤매는 듯 아련한 여운과 동시에 짜릿한 소름이 돋는다.
지휘자 최수열은 이 공연을 끝으로 마지막 부산 공연을 치르는 하프와 첼로 정단원에게 꽃을 전달하고 그들에게 선사하는 곡이라는 말을 남기며 <R. 슈트라우스 내일>을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편곡으로 연주했다. 이 작품이 지닌 지극한 아름다움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현악 앙상블이 들려주었던 "내일(Morgen)"은 또 다른 심연의 정화를 선사했다. 이 연주를 끝으로 단원들은 퇴장하고 뜨겁고 짜릿했던 오늘 연주회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큰 기대감 없이 그들을 만났던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준 그들에게 깊은 감사와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