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지나간다

by 변강훈


오늘의 화두는 '다 지나간다'입니다. 슬픔과 고통, 치욕과 실패, 후회와 이별 등등 인생의 고비마다 왜 내게 이런 순간이 닥쳤을까 여겨졌던 순간들이 참, 놀랍게도 지나고 보면 내 인생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로 남아 있는데, 잠깐 실바람이 불어 머릿결이 휘날리고 피부에 찬바람이 지나간 듯 여겨질 뿐입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무언가를 향하여 씩씩하게 걸어가는 내 모습만 시야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세상사에 험난한 일들이 내게 닥쳐왔지만, 그래서 두렵고 피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피할 곳도 없이 현실은 무섭게 나를 향해 달려듭니다. 어쩔 수 없는 이 파도 앞에, 이 불길 앞에, 나는 무기력하고 대항하거나 피할 수도 없는 벼랑 끝에 있는 형국이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그 직전까지 간 적이 분명 여러 번 아니, 수십 번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분명 현재였던 그 순간들이 과거가 되어 이미 저 먼발치에 보일 듯 말 듯 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저기 저 인간이 나였나 하고 의아해하는 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지나갈 일이었다면 그때 왜 그렇게 무기력하고 안절부절못하면서 두 눈을 꼭 감고 무서워했는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시간은 멈추지 않고 닥친 일들도 나를 붙잡고 머무르지 않는다는 이 법칙을 닥친 일 앞에서 기억하면 좋겠는데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한 게 인간인 모양입니다. 지나간 뒤에 지나가는구나 느끼지 말고 닥쳤을 때 지나갈 거야라고 느끼는 인생, 그 짧은 시차의 판단이 정말 중요한 선택임을 느끼게 됩니다.


얘기하는 것이라 여기지 마시길 당부합니다. 그런 순간들을 지나고 난 뒤 여기 서 있는 게 지금의 나란 뜻입니다. 그런 숨 막히는 무수한 순간을 엄청 지혜롭게 용감하게 당당하게 이긴 것처럼 보이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겁먹고 대책 없던 인간이 그때의 제 모습입니다. 지난 뒤에 수많은 변명과 거짓말과 위세로 나를 감추려 애썼는지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인 우리 모두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오고 성장하고 변했습니다. 한 가지, 돌아보면서 느낀 가장 바람직한 모습은 부끄럽고 무섭고 겁먹는 그 순간 일지라도 솔직하고 진실된 자신의 모습으로 있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지나고 난 뒤 그 어느 날에라도 불쌍한 내가 아니라 그렇게 자라난 어른으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창피했고, 두려워하고, 힘들고 괴로웠기에 지금 내가 있다고. 그렇게 지나왔기에 멋진 내가 여기 지금 당당하게 서 있다고. 고백하며 눈물짓는 백발의 사나이로 말입니다.

작가의 이전글세상 속에서 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