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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o Jul 16. 2021

도박에서도 배운다.

뒤늦은 <도박묵시록 카이지> 리뷰

※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집 근처 만화방에서 만화책을 빌려보는 게 최근의 소소한 취미다.

코로나 때문에 어디 나가기도 꺼려지는 상황에서, 우연히 집 근처에 있는 만화방을 발견했다. 만화 카페가 대부분인 요즘 시대에 만화방이라니...! 만화를 좋아하지만 굳이 만화 카페에 죽치면서 읽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 내 입장에선 간만에 발견한 만화방이 아주 반갑다. 그렇게 단골이 됐고, 매주 한 번씩 이것저것 빌려보는 게 코로나 취준 시기의 소소한 취미다.


오래된 만화방이라 최신 만화가 많은 편은 아니다. 나도 최신 만화는 잘 모르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몰라도 예전에 유행했던, 하지만 아직 보지 못한 작품들을 위주로 보고 있다. <킹덤>, <보루토>, <검은 사기> 같은 그런 만화들을 팔로업한다는 기분으로 쭉 빌려봤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역시 그렇게 접하게 됐다.




연재 25년 차에 접어드는 만화다. 당연히 전성기는 많이 지났고, 개고생만 하던 주인공 카이지의 일대기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는 듯하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뒤늦게 이 만화를 접했다. 짤방으로만 보던 만화를 직접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또 워낙 유명하니 한 번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인터넷 좀 보던 사람이면 많이들 보는 짤들이다


사실 내용이란 건 별로 없다. 백수이자 구제불능의 주인공 카이지가 우연한 계기로 사채, 도박을 비즈니스 삼는 악덕 기업 제애그룹과 얽혀 각종 도박을 하는 얘기다. 각 에피소드 간 연관성이 별로 없는 옴니버스 형식이고, 그래서 전반적인 스토리 자체에서 크게 주목할 것은 없다(몇몇을 제외하면 악역도 계속 바뀐다).


이 작품의 최대 매력은 도박판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심리전과, 그 과정에서 느끼는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그림체는 저래 보여도 성인만화인지라, 각 도박 때마다 주인공 카이지는 돈과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한다. 운이 좋아도 지하 노역장에서 몇십 년간 강제 노역이고, 운이 나쁘면 빌딩 옥상에서 떨어져 즉사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정신 나간 페널티를 걸고 하니 불꽃 튀기는 두뇌 싸움과 심리전이 안 벌어지려야 안 벌어질 수가 없다. 가진 것 전부를 들고 덤비고, 그 과정에서 카이지는 인생과 인간에 대해 성찰하며, (나를 포함한) 독자들도 자연스럽게 감화된다. 물론 도박은 도박이기 때문에 카이지는 도박할 때만 제외하면 영락없는 게으름뱅이이자 구제불능의 인간이며, 작가 역시 도박으로 딴 돈을 어떻게든 잃게 만들어 독자들로 하여금 도박에 매력을 느끼지 않도록 연출하고 있다.




78억 인간의 고독한 외길 인생

시리즈 두 번째 도박인 '인간 경마'는 이런 작품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도박이다. 도박이라고 하기도 뭣한 게, 높은 건물 두 개 사이에 연결된 철근을 건너가는 것이 전부다. 철근에는 전류가 흐르고 있어 손으로 잡을 수도 없으며, 균형을 잃고 떨어지면 그대로 부상, 또는 사망이다.



제애그룹이 주최하는 이 경기의 1라운드는 10미터 정도 위를 건너는 게임이지만, 본격적인 잔인함은 본 게임인 2라운드에서 시작이다. 1라운드의 승리자는 상금을 타기 위한 티켓을 얻지만, 이를 돈으로 바꾸기 위해선 지상 74미터 높이의 건물을 또다시 건너야 하는 것. 10미터쯤에선 부상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여기선 떨어지면 그대로 즉사다. 정신 나간 게임에 몇몇은 포기하지만, 카이지와 동료들은 마음을 다잡고 도전한다.


지상 74미터에서 벌어지는 본 게임

철근 위를 홀로 건너는 사람들에게 동료들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없다. 마음을 이은 동료들이 하나 둘 떨어져도 카이지는 눈물만 흘릴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어느덧 카이지와 다른 친구 둘만 남은 상황. 여기까지 온 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여기까지 살아남은 것에서 느끼는 동료애. 살아서 나가자는 결의, 기필코 승리해서 이 악덕기업의 돈을 뜯어내자는 분노. 그 모든 마음들이 철근 사이에서 느껴지지만, 그 둘은 결코 서로를 도울 수 없다. 그저 상대방을 부르며 존재를 확인하는 것뿐. 이쯤에서 작가는 이야기한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 같아서, 전 지구 78억(연재 당시 56억)의 인간은 고독한 외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그 누구도 도울 수 없고, 단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이 백척간두의 길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부족해 보일 진 몰라도 생과 사의 경계에선 그것이 더할 나위 없는 위로가 된다고 작가는 말한다. 정신 나간 도박에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배울 수 있다.


당첨을 향한 인내심

인간 경마가 인생 전반을 말한다면 '늪'은 개인적인 상황과 맞물려 인상 깊게 봤던 에피소드였다. 인간 경마 이후 여러 이야기를 거쳐 큰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카이지. 제애그룹이 운영하는 불법 카지노에서 구슬 하나당 4000엔에 해당하는 배당률 1000배 빠칭코 '늪'에 도전하게 된다. 성공하면 그동안 모인 7억 엔가량을 토해내지만, 아무도 성공시킨 사람이 없는 빠칭코. 어느 정도 돈을 부으면 성공해야 하는 게 빠칭코지만(안 해봐서 잘은 모름) 이 늪은 아무리 돈을 쏟아부어도 성공하는 사람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카지노 측에서 기기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티가나지 않을 정도로 여러 가지 조작을 통해 카지노는 절대 늪을 성공시키지 못하게 설정해놨고, 섣불리 달려든 사람만 빠져들어 죽게 된다고 해서 사람 잡아먹는 늪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절대 성공할 수 없는 빠칭코에 도전하는 카이지

카이지는 이 불가능해 보이는 늪에 도전한다. 온갖 노력과 준비를 통해 조작을 이겨나간다. 몇 시간 씩 늪 주위를 돌아보고, 카지노 측에게 얻어맞아가며 기기의 비밀을 파내고, 사측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기계를 조금씩 조작해놓는다.

조작 이후엔 실탄과의 싸움이다. 빠칭코라는 기계 특성상 아무리 조작을 해놔도 실탄, 즉 충분한 구슬이 없으면 성공시킬 수가 없다. 문제는 늪 자체가 일반 빠칭코의 1000배에 달하는 불법 기기라는 것. 구슬 하나의 4000엔(한화 4만 원)인 빠칭코를 성공시키려면 적어도 한화 억 단위를 필요하다. 이를 위해 카이지는 여러 동업자와 손을 잡고 돈을 구한 뒤 구슬을 쏟아붓는다. 조작이 풀려나가자 방해하는 카지노 측, 이를 막아내는 카이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투입되는 구슬. 될 듯 말 듯 계속해서 인내심 대결을 해나가는 연출이 압권이다.


사람 잡아먹는 늪 VS 인내심의 인간

취준을 시작하고 거의 100장 가까이 되는 원서를 쓴 것 같다. 300장 넘게 쓴 사람도 있다고 하니 나 정도면 양호하다는 생각마저도 든다. 열심히 쓴 것도 많지만, 우선 하나만이라도 걸려라 싶은 마음으로 쓴 것이 더 많다. 취업이 그렇게 힘들다던데, 실탄을 많이 쏴놓아야 뭐라도 맞지 않겠나. 우격다짐으로 원서를 써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다.


뜬금없어 보일 진 몰라도, 카이지의 늪 공략에서 취준과 비슷한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구슬을 계속해서 붓지 못하면 지는 늪처럼, 나에게 취준 역시 계속해서 지원서란 카드를 쏟아붓는 게임이다(현재형). 때론 될 듯 말 듯하게 당첨 직전까지도 가보고, 그러다가 안되면 다시 쏟아붓고, 좌절하지만 다시 버티고 일어서는 그런 게임. 카이지처럼 카지노의 방해는 없는 건 그나마 나은 점이다. 늪 편에서 카이지가 기어이 승리했을 땐, 그 연출에 감동한 것에 더해 개인적인 감회까지 새롭게 느꼈던 것 같다. 하다못해 만화 속 도박중독자도 저렇게 버티고 버티다 따는데, 나도 버티고 버티면 당첨 구멍에 구슬 하나 들어가지 않겠나. 웃기게도 그런 마음이 때로는 꽤 위안이 된다. 지금까지 본편에서 나온 10개가량의 에피소드 중 늪 편을 가장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연하게 보게 된 고전 명작, 심지어 도박 만화에서 이런 감회와 생각을 느낄 수 있다니. 지금이야 에피소드도 질질 끌고 인기도 떨어져 슬슬 완결로 가고 있지만, 한때 인기 있던 만화의 저력이라는 게 확실히 있구나 싶었다. 다양한 콘텐츠를 찾아보는 것이 새삼 재밌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다.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 PD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아직은 조금 더 구슬을 쏟아부어야 하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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