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살아간다는 것
피아노를 처음 만난 지 올해로 꼭 32년이 되었다. 파리에 있는 여동생이 새해 인사차 전화를 해서는 '이제 음악을 떠나 제2의 삶을 찾아보지 않겠냐' 넌지시 물어본다. 회사에서도 30년이면 은퇴를 한다며.
기분이 나쁘거나 이상하게 들리진 않았다. 작품을 준비하기 시작하면 아침에 눈을 떠서 잠에 들기 전까지 연습, 리허설, 레슨이 반복되는 일상이 얼마나 지루하게 보일지 충분히 이해가 가는 터였다. 더욱이 코로나로 모든 것이 급변하는 이 시대에 과연 고전 음악이 얼마나 미래가 있을지 나 스스로도 확신은 없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산다는 것, 그걸로 내 몸 하나 충분히 건사할 만큼 살고 있다는 것은 소소하지만 큰 기쁨이다. 무대 위의 한 순간을 위해 오랜 시간을 공들여 소리를 만들고 몇백 년 전 타계한 작곡가들이 남기고 간 악보 속의 메시지를 파헤치는 시간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즐거움이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나 무대에서 발현되는 희열, 사실 이게 가장 무섭다.
음악은 순간을 지나가면 사라지는 소리의 예술이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강력한 몰입을 만들어내고 집중의 태평양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전율은 무대가 아닌 그 어떤 곳에서도 느낄 수 없다. 그래서 하나가 끝나면 또 다른 음악을 찾아 세공하고 무대에 올리는 일을 반복한다. 마치 도파민 중독처럼.
고전을 다루는 직업의 성향상 나 역시 다소 내성적이다. 사람을 만나는 것은 좋아하지만 지극히 소수의 지인을 제외하고는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약간 부담스럽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서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를 조금 더 들여다본 솔직한 마음으로는 내 생각을 스스럼없이 꺼낼놓을만큼 내가 좋은 피아니스트인지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작년 한 해는 류재준의 창작 2인 가극 '아파트' 출연과 메시앙의 시간의 종말을 위한 사중주 'End of Time'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며 크게 성장한 시간이었다. 두 개의 큰 프로젝트를 지나고 잠시 숨을 돌릴 때쯤,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가 좋은 음악인인지에 대한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외치고 전달하고 싶은지'가 결국 좋은 음악인의 길로 나를 인도하지 않을까 하는...
이 생각에 대한 확신이 들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더 걸릴지는 미지수다. 그래도 용기를 내보기로 한다. 보다 솔직하게 내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곳을 생각하니 브런치만큼 좋은 공간이 없다.
첫 글의 제목을 '고전의 이름으로'라고 정한 것은 앞으로 브런치에서 공유할 이야기들의 내용을 함축해놓은 나만의 정의다. 격변하는 세상 속 변하지 않을 고전의 가치를 발견하고 나누며 소통하는 여정은 나 스스로도 성장하는 큰 계기가 되지 않을까. 가슴이 설레는 걸 보니 용기 내길 잘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