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품은 여인을 위한 찬가
오마주를 활용해 고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냄과 동시에 특유의 쌈마이 한 감성을 영리하게 사용할 줄 아는 감독 쿠엔틴 타란티노. 그의 작품 중에서도 <킬빌>은 동아시아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사랑을 대놓고 드러낸 영화다. 애초에 주인공인 키도는 사망유희의 이소룡 츄리닝을 오마주해 입고 있지 않은가. 또한 '오렌 이시이'라는 동양계 캐릭터를 통해 재패니메이션을 직접 선보이는 한편 일본 도쿄와 오키나와를 무대로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오렌 이시이는 다른 조연들과 달리 강렬한 서사를 부여받는다. 영화 속에서 또 다른 여성 복수귀로 그려지며 두 여인의 대결을 더욱 극적으로 승화시킨다. 제목은 킬'빌'인데 1부 내내 빌보다 부각받는 빌런이 오렌 이시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오렌 이시이라는 캐릭터에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킬빌이 영향을 받은 많은 영화 중 꽤 기여도가 깊은 영화가 바로 1973년 개봉된 일본 컬트 영화의 수작 '수라설희(修羅雪姬)'인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유키'의 오마주가 바로 오렌 이시이기 때문이다. 수라설희는 부모의 복수를 위해 복수귀로 자라난 유키의 복수과정을 그린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서사적 요소와 연출을 킬빌에서 카피하다시피 차용했다. 특히 하얀색 기모노를 입고 일본도를 휘두르는 킬빌의 오렌 이시이는 수라설희의 유키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한술 더 떠 수라설희의 주제곡인 '수라의 꽃(修羅の花)'을 아예 킬빌 OST로 차용하기에 이른다. 바로 눈 내리는 정원에서 오렌 이시이와 주인공의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가 끝나는 순간 흘러나오는 음악이다.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 속 처절한 두 여인의 사투가 끝나고, 구슬픈 엔카 리듬과 함께 우수에 젖은 보컬이 울려 퍼진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가사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사연을 품은 두 사람의 숙명적 대결을 숭고하게, 그리고 더욱 처절하게 만들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가사 내용을 알고 본다면 감동은 두 배가 된다.
死んでいた朝にとむらいの雪が降る
숨을 거둔 아침을 애도하는 눈이 내리네
はぐれ犬の遠吠え 下駄の音きしむ
떠돌이 개는 멀리서 짖고 게다 소리가 삐걱삐걱
いんがなおもさみつめて歩く
인과의 무게를 바라보며 걸어가는
闇を抱きしめる 蛇の目の傘一つ
어둠을 품은 고리무늬 우산 하나
いのちの道を行く女
목숨의 길을 가는 여자
涙はとうに捨てました
눈물은 이미 버렸습니다
ふりむいた川に 遠ざかる旅の灯が
뒤돌아 본 강물에 실려 방랑의 세월이 멀어져 가네
凍てた鶴は動かず 哭いた雨と風
얼어붙은 학은 움직일 줄 모르고 울어댄 비와 바람
冷えた水面にほつれ髪映し
싸늘한 수면에 헝클어진 머리 비추며
涙さえ見せない 蛇の目の傘一つ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고리무늬 우산 하나
怨みの道を行く女
원한의 길을 가는 여자
心はとうに捨てました
마음은 이미 버렸습니다
義理も情も 涙も夢も
의리도 자비도 눈물도 꿈도
昨日も明日も 縁のない言葉
어제도 내일도 나와는 인연 없는 말
怨みの川に身をゆだね
원한의 강에 몸을 맡기고
女はとうに捨てました
여자이기는 이미 포기했습니다
복수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여자의 결연한 마음 가짐을 담은 노래다. 복수 앞에 과거도, 오늘도,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삶도 다 부질없음을 노래한다. 담담히 숙명을 받아들이는 가사가 애처롭다. 오렌 이시이와 주인공은 서로 철천지 원수지간이기도 하지만 동병상련의 처지이기도 한 것. 하지만 날카롭게 다듬어진 복수의 칼날 앞에 자비와 동정은 있을 수 없었다.
'수라의 꽃'은 수라설희에서 여주인공 유키를 연기한 배우 '카지 메이코(梶芽衣子)'가 직접 불렀다. 그녀는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다 복수가 주된 내용이다. 모델 출신으로서 복수에 어울리는 차갑고 시크한 페이스에 퇴폐미까지 겸비해 컬트적인 인기를 얻었고 할리우드에서도 러브콜을 받았다.(언어 문제로 할리우드 진출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그녀의 광팬이다. 직접 만난 적도 있다. 오렌 이시이를 통해 그녀를 오마주하고, 아주 적절한 그녀의 곡을 OST로 재사용한 이유다. 심지어 킬빌2 엔딩곡도 그녀의 노래를 쓰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xjNiZFxq5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