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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일수록 그만큼 슬픈 거라고

하루키와 개츠비에서 이동진 김동률까지

by 담백한 책생활

단순 노동의 즐거움은 좋은 콘텐츠를 만나면 극대화된다. 주말 집안일 메이트는 이동진이 진행하는 유튜브 채널 라이프 플러스 TV였다. 주제는 ‘첫사랑’. <건축학개론>부터 <러브레터>. <말할 수 없는 비밀>, <위대한 개츠비>까지 이름만 들어도 아련해지는 그 시절 사랑 영화들이 언급됐다.


오겡끼데스까. 와타시와 겡끼데스. 러브레터 속 나카야마 미호의 애절한 목소리에 한 번,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처럼 덧없는 사랑을 멈추지 않는 개츠비의 위대함에 공감하다 두 번 울컥했다. 사랑이 뭐라고.

아름다운 것은 왜 슬픈가

김동률 신곡이 나왔다. <산책>. 잠결에 인스타그램에서 소식을 확인하고 출근길에 듣다 울었다. “울어도 되는 걸까. 아름다운 것일수록 그만큼 슬픈 거라고.” 아닌 게 아니라 아름다움은 때로 슬픔을 동반한다. 슬프도록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슬프고. 아름다운 것은 왜 슬플까. 황인찬 시인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손에 닿지 않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손에 닿지 않는 감각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요체이자, 아름다움이 자아내는 슬픔의 까닭이라는 것.

10km는 처음이라

춘천마라톤대회가 있었던 일요일에는 집 근처에서 혼자 10km를 뛰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건 지난해 12월 26일이다. 아빠의 10주기를 지낸 다음 날이었고 불현듯 뛰고 싶어졌다. 4km도 겨우 채우던 시절에는 10km를 가볍게 달리는 SNS 속 러너들은 무슨 생각할까 궁금했는데, 막상 해보니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근육이 뻐근하고 무감각해졌다. 이런 기분이구나. 하루키 식으로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성취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내 머릿속에는 이제 더 달리지 않아도 좋다는 안도감뿐이다.”


하루키와 개츠비가 남긴 사랑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은 남자라면 나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군 하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나가사와와 와타나베의 첫 만남.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 속 문장이다. 하루키 소설 중 유일한 리얼리즘 소설이자, 고1 때 밤새워 읽던 연애 소설, 그리고 내 인생 소설. 어릴 때 읽은 책은 자라서 읽은 책과는 공명하는 정도가 다르다. 모든 사랑은 슬프고 아름답지만 첫사랑이 그 깊이에 상관없이 이후의 사랑과 비교 불가한 것과 비슷하겠다. 아마도 자아 형성에 영향을 주기 때문일 것. 공교롭게도 둘의 만남 역시 시월의 일이었다.


언젠가 ‘개근 거지’라는 단어에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학기 중 해외여행을 가지 않고 꾸준히 등교하는 학생을 비하하는 신조어라던가.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 경험이 주는 동기 부여의 힘을 아는 초등맘으로서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높아진 소득 수준, 양극화, 자유로워진 해외여행. 자본주의가 부른 자연스러운 결과지만 완전히 새로운 현상도 아니고.


비슷한 비난은 이전에도 있었다. 핵심은 성실성이 폄하된다는 데 있으니까.


이를테면 “능력 없으면 성실하기라도 해야지. 내가 그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겠다,” 같은. (비유컨대) 그렇게 공부했는데 서울대 못 간 근로노동자는 지금도 종종 박카스를 박스로 주문하며 자괴감이 든다. 열심히 말고 잘해야지..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는 용기, 그 차이를 분별하는 지혜, 가만히 니버의 기도를 떠올리다, 모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함은 분명 재능이다. 하루키와 개츠비의 위대한 점은 무망한 것을 반복할 줄 아는 능력에 있다. 그것은 삶을 향한 지극한 사랑이 아닐까. 나아가, 글로 사랑을 증명했다는 것. 피츠제럴드의 문학, 하루키의 달리기 에세이가 아니었다면 그들이 누구든, 어떤 치열한 사랑을 했든, 우리는 알지 못했을 것이므로.


사랑, 고통, 사소하지만 오늘을 살게 한 온기와 스쳐 지나는 빛나고 낯선 감각들. 사라져 버리고 말 기억을 글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증거하려는 인간의 기록 욕구는 어쩌면 모든 것에 끝이 있다는 사실의 방증인지도 모른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 각자의 자리에서 오늘을 성실하게 채워가는 이들을 알고 있다. 저마다 모두 위대하다는 것도. 이토록 슬프지만 아름다운, 시월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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