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동아리의 달콤한 함정에 빠진 어느 팀장의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사내동아리 활동을 적극 권장한다는 이메일을 보내왔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몇 년간 지속적으로 직원만족도 조사 결과가 저해되고 있다는 사실에 어떻게든 사람들이 즐겁게 회사를 다니게 하고, 다른 회사들이 갖고 있는 조직문화나 복지의 구색이라도 갖추려고 하는 노력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비록 그렇기 때문에 시도하는 것들이 대부분 어설픈 역효과를 불러오긴 하지만.
동아리라고 하면, 통상적으로는 비슷한 목적이나 관심사 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그 분야에 대해 더욱 공부하거나, 아니면 각자의 경험을 나누기 위해 모인 사람들을 말한다.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누군가와 공유할 만한 취미를 갖고 있지 않은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살면서 동아리 활동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동아리 활동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학교에서조차, 대부분의 시간을 나는 도서관 또는 학과사무실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런 연유로, 한창 사내동아리 활동을 지원한다는 회사의 그 메일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동아리를 결성해 가입을 유도하고 활동을 시작할 때에도, 나는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살짝 놀랐던 것이, 사실 분기에 얼마 안 되는 지원금을 지원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딱히 관심을 갖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얼마 안 되는 돈이라도 이른바 회사의 '공돈'아닌가. 생각보다 사람들은 적은 돈이라도 기꺼이 활용하고 싶어 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한동안 어느 동아리에도 속하지 않은 무가입자로 남았다.
그러던 차에, 사업계획을 짜야하는 시기에 협의할 일이 있어 방문한 공장의 출장길에, 지금의 동아리 회장님이 종이 한 장을 쓱 내밀면서 나에게 물었다.
"팀장님, 분기에 공짜로 책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가입 안 하실래요? 이름만 빌려주시면 돼요"
그 종이는, 회장님이 손수 꾸미신 독서동아리 홍보용 프린트였다. 골자는, 독서의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꾸준히 분기마다 동아리 지정도서 1권, 그리고 각자 읽고 싶은 도서 1권을 활동비로 구입하여 독서 후 각자의 감상을 나누자는 평범한 독서동아리의 면모였다. 책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분명 좋아하고, 무엇보다 분기 2권, 1년이면 8권의 책을 경비로 구입할 수 있다는 건 꽤 구미가 당기는 말이긴 했다.
-그런데 나는 소속이 서울인데, 이렇게 구미공장에서 만든 동아리 가입해도 괜찮대?
"아, 된대요. 이게 지금 최소가입자수가 조금 부족해서... 이름만 올려주시면 읽고 싶으신 책 사서 서울로 올려 드릴게요. 가끔 내려오셔서 같이 이야기만 하시면 돼요^^"
-그래요 뭐, 그 정도라면 어렵지 않지. 여기 신청서에 쓰면 되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때 나는, 재무회계팀장으로서 서류에 함부로 서명한다는 행동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물을 불러올 수 있는가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봤어야 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입맛 당기는 제안을 해올 때면 보통 그 이면에 무언가 있다는 말에 대해서도 떠올렸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회장님과의 개인적인 친분과 유대관계에 취해 본질을 제대로 보지 않고 홀린 듯 서명했고, 접수된 서류는 그렇게 결코 반환되지 못한 채 나는 독서동아리 회원이 되었다.
한발 더 나아가서는, 가입정족수를 간신히 채울 것 같다는 회장님의 초기 가입 유도멘트와 달리, 최종적으로 승인된 동아리 회원수는 같은 서울사무소에서도 몇 명이나 추가 영입이 이루어졌다. 서울과 구미 간의 멤버가 비슷하게 충원되자, 회장님은 나에게 자연스럽게 책은 사서 올려드릴 테니 여러 모로 지원을 부탁드린다며 부회장 역할을 지정했다.
이런 귀찮은 일을 시킬 거였으면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지만 허약한 거절의 언어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저 순간적으로 회장님의 insight 컬러 결과물이 나와 다른 열정의 붉은 레드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만들었을 뿐.
INTJ 답지 않게, 사람의 편안함에 이끌려 너무나 쉽게 경계벽을 허물어버리고 내 공간을 허용한 결과 나는 그렇게 나답지 않게 사내 독서동아리의 부회장이 되었다. 그래도 이렇게 된 이상, 괜히 이름만 올려둔 채 무심히 지나치기보다는 한 번쯤은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서명은 해버렸고, 부회장이라는 타이틀도 붙어버렸으니 말이다.
책을 읽는 일은 여전히 좋고, 누군가와 생각을 나누는 일도 가끔은 나쁘지 않다는 걸, 이참에 다시 확인해 볼 수도 있겠지 하는 생각도 있고, 어쩌면 이 어색한 동아리라는 공간이, 회사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내가 조금 덜 삐걱거리며 버티게 해 줄지도 모른다. 그렇게, 나답지 않게 시작된 이 일이, 뜻밖에도 나를 조금 더 나답게 만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