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아내의 모습을 딸에게서 바라보며
결혼 후에 내가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은 '도둑놈'이었다. 아내와 나의 나이차이가 9살이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산적같이 생긴 놈이 미녀를 쟁취한, 미녀와 야수의 재림이라는 것 때문도 있을 것이다. 내 주관적인 심미안을 배제하고서도, 친구들이 아내를 처음 본 날 놀랐던 걸 생각하면 객관적으로도 아내는 예쁜 축에 속하는 모양이다.
그 도둑놈은 18년 이후부터 7년의 결혼생활을 이어가며 아내를 닮은 예쁜 딸을 두 명이나 가질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사실, 여담이지만 아내가 둘째를 원했을 때 나는 내심 굉장히 고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첫째는 내 분위기는 있어도 전체적으로 아내의 외형을 많이 닮았는데 혹시 둘째가 나를 닮아, 나중에 커서 '왜 나는 엄마 안 닮았어?'라는 질문에 대답해 줄 길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험수 같은 도박이었지만, 전생에 나라를 구한 힘이 충분히 있었는지 둘째도 나를 닮지 않고 아내를 많이 닮았다. 물론, 여전히 내 유전자가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확연히 구분되는 것이, 눈이 작은 나에 비해 두 아이 모두 눈이 충분히 크다는 사실에 나는 탯줄을 자르는 순간부터 몹시 안도했다.
그렇게 첫째 아이가 나온 지도 어느덧 5년이 넘은 시간이 지났다. 곧 세 번째 유치원을 옮길 딸아이가 2년만 더 있으면 초등학교에 입학한다는 사실은 새삼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나, 하고 흐르는 시간 속에 멈춰져 있는 자신을 이따금씩 일깨우게 된다. 내가 정체된 건지, 아니면 나의 속도보다 체감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시계가 빨리 도는 건지.
딸을 가졌다는 말을 할 때부터 주변에서 으레 그런 말을 들었다. 또 하나의 딸바보가 탄생했다고. 나 같은 사람이 장인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면 미래의 사위가 불쌍하다고. 나중에 결혼식 안 시키실 것 같다 등등 여러 가지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예측들이 난무했다.
나는 나 스스로가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아이에게 해줄 수 있기에는 내게 남은 정신적 에너지가 그리 풍족한 편이 아니었기에.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게 무엇일까를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아빠가 된다는 사실은 때로 덜컥 겁도 났었다. 지금도 사실, 좋은 아빠인가에 대한 의문은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고.
그래도,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할 수 있는 건 내가 딸을 충분히 사랑하려고 노력하려고 하긴 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예전에 들었던 말 중 하나인 '딸에게서 아내의 어릴 적 모습을 엿본다'라는 말을 충분히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유전의 힘이라는 게 강해 봐야 얼마나 강하겠나, 하는 생각을 예전에는 했었다. 사람이란 각기 다른 인격체니까 태어날 때 이미 다른 기질을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딸아이를 볼 때마다 생김새만 아내를 닮은 게 아니라, 아내의 행동을 따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잠들기 전 팔과 다리 마사지를 해 달라는 모습이라든지, 등을 긁어 달라고 얘기한다든지, 팔짱을 끼고 토라지며 "아빠가 잘못했잖아!"하고 따지고 들 때라든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마치 어릴 적 아내였다면 이랬을 거라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아빠는 딸바보가 되는 게 아닐까. 만나지 못했던 아내의 유년을 다른 형태로 되돌려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를 더 온전히 지켜주고 위해.
아마 채 10년이 지나지 않을 무렵 딸은 이제 방문을 닫고 아빠의 출입을 엄금하는 때도 오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 최선을 다하고 싶어지는 건 모든 딸을 둔 아버지의 마음이겠지. 부디, 시간을 잡을 수 있는 힘이 조금 더 주어지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