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친구를 기다리는 일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부모님 세대 입장에서는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을 하고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하고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는 것이 좀 더 당연한 일이다. 생김새도 성격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순서대로 살아가는 것은 퍼뜩 생각해봐도 앞뒤가 안 맞는 일인데 말이다. 그렇지만 나 역시 으레 행해지는 관습을 따르지 않아도 길이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안 지 오래되지 않았다.
작년 2월 난 결혼을 했다. 결혼은 여전히 부부만의 일이 아닌 양가 집안의 일이고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입장은 절대 같을 수 없으며 연애할 때의 남자와 배우자로서의 남자도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짐작은 했지만 직접 겪는 결혼 생활은 예상보다 훨씬 혼란스러웠다. 결혼 전 혼자 자취한 기간이 길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이 더 불편하고 적응하기 힘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일일드라마의 결말이 대부분 그렇듯 결혼을 하고 얼마 있지 않아 곧바로 아기가 생길 줄 알았다. 드라마 마지막 회의 마지막 부분은 1년 후로 건너뛰어 꼭 여자의 배가 불러 있거나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곤 했으니까. 하지만 나에게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혼을 하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 꽤나 많지만 임신과 관련하여서는 정말 하나도 몰랐다.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엑셀과 복사기를 사용할 줄 몰라 앞이 막막했던 때가 떠올랐다. 이론을 공부하고 시험을 잘 봤다고 해도 실무는 처음부터 따로 익혀야 했다. 피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아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가 어리고 건강할수록 그 가능성은 높지만 모든 조건을 충족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도 환경적, 심리적 문제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를 하며 임신을 시도해도 일 년 이상 실패하면 난임이라고 한다. 부부가 건강하다는 전제하에 남자의 나이는 별다른 영향이 없지만 여자의 나이는 크게 작용해서 35살이 일종의 경계선이라고. 난 올해로 35살이 되었고 결혼 1주년이 다가오고 있다. 어차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신혼을 즐기자고 마음을 먹어도 말처럼 쉽지 않다. 보는 이마다 좋은 소식이 있냐고 물어올 때면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는 한 번이지만 나에게는 셀 수 없이 자주 겪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나가는 이들의 말은 흘려버리면 그만인데 은연중 소식을 묻는 시부모로 인해 신경이 '많이' 쓰이기 시작했다.
기다림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이 많아지고 두려움도 깊어진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이런 나를 파악하고 임신과 출산에 관한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해 주었다. 무슨 일이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건만 부정적이고 자극적이며 회의적인 이야기들만 가득했다. 여자는 몸이 망가지고 경력이 단절되는데 남자는 딱히 손해 보는 게 없어 보여서 괜히 그가 얄미웠다. 임신과 출산, 단순히 지나갈 보통의 일이 아니기에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때문에 과하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도, 겪어보지 않은 일로 배우자를 원망하는 것도 그저 우스운 일이었다.
난 취미가 많다. 글쓰기는 물론 사진과 그림, 뜨개질 등 이것저것 일을 벌이기 좋아해서 늘 혼자 바쁘다. 날이 좋으면 카메라를 챙겨 어디든 달려 나가고 하다못해 동네 한 바퀴라도 돌아야 한다. 그런데 결혼을 한 이후로, 마치 임신을 하지 않으면 나의 존재가치가 없어지는 것 마냥 '임신'이라는 사건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었다. 사회적 관습과 들려오는 주변의 사람들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마음을 썼을까. 그 말은 그만큼 나 자신보다 타인의 말과 시선에 휩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아기를 낳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결정과 책임은 오로지 부모가 될 우리 부부의 몫인데 책임 없는 인사치레에 휘둘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리가 맑아졌다.
결혼을 했고 아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없다. 여기까지가 더할 나위 없는 지금 나의 상태이다. 그리고 이 상태로도 나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여러모로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면 끝이 없지만 한편으로는 세상 그 어떤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손익을 따질 수 없는 일이다. 우선은 다른 이의 눈치를 볼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며 엄마가 될 준비를 하기로 한다. 물론 완벽히 준비되진 않을 것이다. 뭘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주어진 오늘을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기며 새로운 친구를 기다리면 가장 좋은 때에 찾아오지 않을까. 그럼에도 아직까지는, 엄마의 마음보다 나 자신의 마음으로 두렵다.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 가고 싶다. 아니면 그 순간을 빨리 감기 하거나 뛰어넘고만 싶다.
2021년 2월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