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스무 살에 봉사활동 동아리에서 선배를 만났다. 특별할 것도 돋보일 것도 없는 외모였지만 그에게는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강단 있고 고집도 세며 욕심도 있는 사람이었다. 허연 순두부처럼 흐리멍텅하게 살던 나와는 달라서 더욱 끌렸다. 그도 순한 내 모습에 끌렸는지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인이 되었다. 서로의 가족 행사에도 자연스레 참석하며 지냈다. 나의 이십 대는 그를 빼고는 논할 수 없을 만큼 그로 빼곡히 채워졌다.
선배의 어머니는 늘 아들이 함안에서 제일 멋있다고 자랑하셨다. 함안역에서 내린 아들이 읍내길을 걸어오면 길이 환해질 만큼 당신의 아들이 잘생겼다며 칭찬을 늘어놓으셨다. 그의 외모를 보고 사귄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매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매력을 자주, 깨알같이 일러 주셨다. 다섯 살에 아픈 엄마 걱정에 혼자 약을 사다 준 효자, 명절마다 친척 형들을 붙잡고 가지 말라며 울던 정 많은 아들, 고2 때까지 성적이 낮았지만 단 1년 만에 전교에서 가장 큰 성적 향상을 이뤄낸 우등생…. 세 남매 중 가장 믿고 의지하는 장남, 어머니에게 그는 보통의 장남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절에 다니시던 어머니께서 받아 오신 길일은 12월 13일이었다.
4년을 일했지만 제대로 모은 돈이 없었던 나, 공익근무로 돈 벌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남편도 형편은 비슷했다.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각자 500만 원씩 모아 예식을 준비했다. 신혼집은 전세 대출로 마련하고, 가전과 가구는 카드 할부로 사자고 약속했다.
결혼을 준비하며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남들 다 받는 프러포즈도 없이 결혼을 서두르려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과연 이 사람을 믿고 살 수 있을까, 잘 해낼 수 있을까 나 자신에 대한 의문도 생겼다. 배려심 많은 예비 신랑이었지만, 결혼할 땐 이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냐며 주변에서 해 주는 말에 귀가 팔랑이곤 했다.
그 무렵, 모든 계산이 헛된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일이 벌어졌다. 한동안 어깨가 아프다며 물리치료를 받던 어머님이셨다. 혹시 뼈에 이상이 있나 X선 촬영을 하러 갔다가 폐에서 무언가가 발견되었다고 했다. 의사가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말을 했단다. 어머니는 이미 폐암 말기. 몸의 다른 조직에까지 암이 전이돼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기적인 나는 생명이 꺼져가는 어머니보다, 사랑하는 엄마가 폐암 말기라는 말을 들은 예비 신랑보다, 엄마 복도 지지리 없는 내가 가여웠다. 나보다 더 절망에 빠져있을 시댁 식구들보다 결혼하면 어머니 수발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내 걱정이 먼저였다. 이제 좀 편하게 살 수 있나 기대했지만 자꾸만 역경을 던져주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어머니 간호로 신혼의 단꿈은 포기해야 할지도 몰랐다. 까딱하면 홀로 남은 시아버지와 시동생들까지 뒷바라지해야 했다. 고생길이 뻔한 결혼. 주변 사람들은 조심스레 나를 말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결혼을 미루든 취소하든 예비 신랑에게도 시간과 여유가 필요한 시기였다. 아픈 엄마를 놔두고 결혼 준비를 하느라 시간을 보내는 선배의 속은 새까맣게 그을리고도 남을 지경이었으니까.
어머님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아픈 당신 때문에 아들 결혼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어머님께 얹어드릴 수는 없었다.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을 받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불안해하는 주변의 모두에게, 어쩌면 흔들리고 있던 나에게조차 확신이 필요했다.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혼인신고부터 했다. 친정 식구들은 아무도 모르게 나는 세대주 안현우의 처 강혜진이 되었다.
서둘러 어머님 입원실에 들러 혼인신고 소식을 알려드렸다. 이미 머리가 다 빠진 채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 손을 잡았다. 혼인신고서를 펼쳐 보이며 말씀드렸다.
“어머니, 저 이제 진짜 어머니 며느리 됐어요.”
침대에 누운채 기력이 없는 듯 바라보던 어머니는 그 종이 한 장을 한 참동안 쳐다보셨다.
“어머니, 저 유부녀 되고 제일 처음 먹은 음식이 뭔 줄 알아요? 우리 오늘 함안 군청 앞에서 돼지국밥 먹고 왔어요. 분위기 없게 돼지국밥이 뭐예요? 평생 한 맺힐 거 같은데 어쩔까요?”
어머님 좀 웃으시라고 농담을 섞어 말씀드렸다. 어머니 얼굴에 슬쩍 미소가 떠오르는 것도, 살짝 눈물을 보이신 것도 같았다.
어느 일요일 저녁, 그날도 요양원에 들러 어머니 팔다리를 주무르다 집으로 돌아왔다. 막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렇게나 빨리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검은색 코트를 걸쳐 입고 황급히 달려간 장례식장에서 무너지지 않으려고 정신을 붙들고 있는 남편을 보았다. 한 사람의 목숨이 이다지도 허무하게 흙으로 돌아갈 수도 있구나 느꼈다. 그날이 11월 22일. 결혼식을 불과 3주 앞둔 날이었다.
며느리인 나는 결혼식 올리기 전에 장례식을 먼저 치러야 했다. 누구 하나 제 정신일 수 없었던 장례식.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무너져 내린 시댁 식구들과 낯선 친척들 사이에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문객을 받고 조의금 장부를 정리했다.
발인이 끝난 후 남편은 신종 플루에 걸려 일주일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다. 쓰러진 어머니를 살리려고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던 남편이었다. 어머님은 암으로 약해진 폐에 바이러스 감염까지 겹쳐 그렇게나 서둘러 눈을 감으신 것 같았다.
가끔 그때로 돌아가는 꿈을 꾼다. 다시 그 기로에 선다 해도 과연 같은 선택을 했을까. 확신은 없다. 그를 지켜주기 위해 결혼을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글쎄, 손가락질받을 용기가 없어 그냥 결혼했을 뿐인지도 모른다. 단 한 가지는 분명하다. 주변 사람들 말대로 이 결혼을 포기하고 다른 선택을 했다 한들 남편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을 거란 것. 힘든 상황에도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혼자 고군분투했을 남편의 강인함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없어도 홀로 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알아보고 혼인 신고한 과거의 내가 기특할 뿐이다.
결혼을 결심한 순간부터 그는 최고의 남편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내 편이었다. 어머니가 살아생전 말씀하셨던 것처럼, 안현우는 내가 믿고 의지할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가진 남자였다. 지난 23년 동안 변함없이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때로는 까칠해도 늘 옳은 말만 하는 남편 덕에 나는 행복한 아내, 행복한 엄마로 살아왔다.
어머님의 말씀이 옳았다. 세상에서 제일 멋진 남편, 그는 나의 지난 시간을 지탱해 준 힘이자 앞으로의 삶을 함께 걸어갈 가장 든든한 동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