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 가을, 둘째를 낳았다. 산부인과에서 1주, 조리원에서 2주를 보내고 삼칠일이 지나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밤에는 통잠을 잘 만큼 순했던 둘째는 집에 오자마자 콧물을 흘리고 열이 나기 시작했다.
유난히 호흡기가 약한 첫째는 찬바람이 불면 연신 맑은 콧물을 흘리며 재채기를 해댔다. 맑던 콧물은 이내 누런 콧물로 변해 어김없이 항생제를 처방받아야만 고칠 만큼 심해졌다. 가끔 열이 나기 시작하면 기관지염·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수액 치료를 받아야만 퇴원할 수 있을 정도로,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약골이었다.
어린이집에서 감기를 옮아 온 첫째는 신생아인 둘째에게도 감기를 옮겨주었다. 태어나 50일을 살면서 20일간 산부인과와 조리원에서, 15일은 소아과 병동에서 지낸 둘째가 겨우 퇴원해 다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코앞에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즈음 우리 할머니는 혼자 집에 계실 수 없을 만큼 치매가 심해져 요양원에 머무르셨다. 만삭의 몸으로 첫째 손을 잡고 할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가면, 팔다리가 홀쭉해진 할머니가 초점 없는 눈으로 두리번거리시다가 나를 보고 “순자 왔나?” 하고 큰고모 이름을 부르며 엉뚱한 소리를 하시곤 했다.
“순자가 아니라 혜진인데 왜 못 알아보시냐”며 어이없는 울음을 터뜨리면, 그제야 내 옆에 있는 남편을 알아보며 “안 서방, 잘 지냈는가?” 하고 아는 척을 하셨다.
둘째가 태어나고 아이를 데리고 외출해도 별 탈이 없다는 삼칠일만 지나면 가장 먼저 요양원에 가서 할머니한테 딸아이를 안겨드릴 참이었다. 그런데 신생아인 둘째마저 입원해 병원에서 지내다 보니, 날씨가 조금 더 따뜻해지면 요양원에 가야겠다고 할머니 보러 갈 날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새벽, 밖은 캄캄한데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밤새 아이 젖을 먹이느라 잠을 설치다 겨우 잠이 들었는데도 묘하게 눈이 떠졌다. 휴대폰에 뜬 작은고모의 번호는 전화를 받기도 전에 불안한 소식을 전해줄 거라는 짐작이 들게 했다.
“혜진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네. 병원이 어디래요?”
담담하게 전화를 끊고 나니 눈물이 흘렀다. 누가 볼까 혼자서 잠깐 울다 정신을 차리고 짐가방을 꾸렸다. 예쁜 공주님을 낳았다고 자랑하러 가기로 했는데, 그곳이 요양원이 아니라 장례식장이라니. 제일 먼저 할머니를 만나러 갔어야 하는데 미루고 있던 나를 지독하게 자책한 날이었다.
호흡기가 약한 할머니 유전자 탓이라며 결국 예쁜 우리 둘째를 못 만나고 돌아가신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할머니 탓이니까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어디서 혼이 된 할머니가 있다면 내 마음을 들으라고 속으로 요란하게 외쳐댔다. 늦었다는 후회와 미안함, 그리고 할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보낸 죄송하고 섭섭한 마음을 결국 할머니에게 쏟아냈다.
뭐가 그리 급해서 밤새 혼자 돌아가셨는지,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두려우셨을지 생각하니 너무 오래 할머니를 뵈러 가지 못한 마음이 더 아팠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요양원에 가기를 결정했을 때 이미 할머니 짐을 많이 정리해서 친정집에 할머니 짐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다. 누구한테 얻어다 썼는지 짝이 맞지 않은 냄비와 그릇들, 옷가지 몇 개를 정리했다. 옷장 한쪽에는 포장을 뜯지도 않은 내복과 싸구려 나일론 양말 몇 켤레가 들어 있었다. 늘 “다음에 혜진이, 태진이 시집·장가가고 아들·딸 낳고 나서 좋은 날 입을 거라”며 새것은 아껴두고 허드레 것만 꺼내어 쓰던 할머니는, 몇십 년 동안 간직하던 누가 사 주었는지도 모를 내복 몇 벌만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폐가 좋지 않으셨다. 조금만 걸으면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숨쉬기를 어려워하셨다. 할머니 품에 안겨 자면 할머니 날숨에서 비릿한 냄새가 났다. 폐가 안 좋아 그런 것이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가 안아주면 좋았다.
사춘기가 다 지나고 훌쩍 커서도 할머니를 꼭 안고 같은 방에서 잤다. 시집와서 내 가정을 꾸리고 내 아이를 낳고 키우며, 할머니가 밤새 안아주신 것처럼 아이들을 꼭 안고 잤다. 할머니 날숨 냄새처럼 아이들도 나의 숨 냄새와 체취를 기억하며 따뜻한 사랑을 느끼며 자랐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가래가 끓어 석션으로 가래를 뽑아내셨다고 했다.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와 쉬는 내가 걱정할까 봐 아무도, 심지어 요양원에서도 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으면 얼른 큰 병원으로 모셨어야 하는데도 내 새끼 챙기느라 할머니는 까맣게 잊고 살고 있던 나는 미안한 마음이 커서 그랬는지, 장례식장에서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입관하는 날, 할머니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가족들이 모였다. 관뚜껑을 열자 할머니는 아직 살아 있는 듯한 모습으로 관 속에 누워 계셨다. 마지막 가시는 길, 예쁜 모습으로 보내드려야 한다며 장례사들이 할머니 얼굴에 곱게 화장해 주었다. 여태 눈물 한 방울 나지 않던 나는 그 모습에 무너져 버리고야 말았다.
평생 자식이 사 준 새 옷도 맘 놓고 입어보지 못한 할머니가, 싸구려 로션 하나 자기 얼굴에 바르는 것을 본 적이 없었던 할머니가, 입술에 빨간 연지를 바르는 것은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다 가신 할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화장한 모습이라니. 할머니도 여자였다는 것을, 예쁘게 꾸미고 사랑받고 살고 싶은 여느 여자들과 다르지 않은 여자였다는 것을, 할머니의 마지막을 마주하는 날 너무 늦게 깨닫게 되었으니 그 울음이 쉬이 그치지 않았다.
할머니의 마지막을 마주한 날 이후로 삶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게 되었다. ‘죽음을 기억하라’던 그 말이 이제야 제대로 나에게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내일만 기약하며 오늘을 살지 않는 나였다. 나중에 좋은 날이 오면 누릴 거라며 넣어 둔 옷장 속 새 옷처럼, 나도 할머니처럼 오늘을 즐기지 못하고 내일만 준비하며 살고 있었다.
엄마라는 이름에 걸맞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선생님이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내가 사랑받고 싶은 여자인 것을, 내 아이들만큼 나 또한 소중한 사람인 것을 잊고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처럼 초라하게 살다 죽음과 맞닥뜨린 그날 비로소 오늘을 즐기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닐지 무서웠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무언가가 있다면 너무 늦지 않은 지금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무언가가 있다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한 번쯤은 되뇌어 보기로 했다. 그 이후로 무엇이 소중한지,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소홀히 하는 것이 있지는 않는지 오랜 시간 고민해 보게 되었다.
할머니와 이별한 날, 나는 나 자신과 제대로 마주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