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짜증 나. 선생님, 가로로 돌려서 그리면 안 돼요?”
미술 시간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다. 점 하나도 찍히지 않은 도화지를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던 기현이가 잔뜩 화난 듯한 목소리로 질문한다. 기현이는 미술 시간에만 그런 게 아니다. 수학 시간에도 열 문제 중 여덟 문제만 풀면 안 되냐, 시간 없으니 집에 가서 숙제로 해 오면 안 되냐며 자주 무리한 요구를 한다. 뭐라고 대답하는 것이 지혜로울지 고민하고 있던 참에,
“선생님이 세로로 그리라고 했잖아.”
기현이의 짝 효빈이가 나를 대신해 대답한다. 효빈이 얼굴엔 불편한 기색이 가득하다. 교실에 있던 다른 아이들이 하나둘 효빈이 편을 들며 기현이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조용히 깔린다. 기현이에게 할 대답은 잠시 미뤄두고 효빈이를 먼저 챙겨본다.
“효빈아, 만약에 선생님이 기현이한테 가로로 돌려서 그려도 된다고 대답하면 넌 어떨 것 같아?”
시키는 건 유심히 기억했다가 곧이곧대로 하는 모범생 효빈이는 가로로 그려도 되는 거였냐며 되묻는다.
나는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아이들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그리고 가로로 돌려서 그리는 걸 허락하면 어떤 문제가 생길지 교실 전체 아이들에게 물었다. 많은 아이들이 처음 시작할 때 선생님이 세로로 그리라고 했기 때문에 그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선생님이 지금 가로로 그려도 된다고 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효빈이는 입을 다물었고, 교실은 일순간 조용해졌다. 아이들이 효빈이의 눈치를 살핀다.
머뭇거리던 승희가 용기를 내 불만을 표현한다. 자기도 가로로 그리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세로로 하라고 해서 아무 말 못 하고 하라는 대로만 했단다. 그래서 기현이도 세로로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정말로 세로로 그려야 하나? 아이들의 대답을 들으며 나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세로로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다. 만약 처음부터 누군가가 “가로로 그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면, 나는 분명히 그러라고 했을 것이다. 애초에 세로로 그려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대회에 제출하는 그림처럼 규격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그림이라는 건 그리는 이의 창작물이기에 세로든 가로든 상관없다는 게 나의 입장이다.
누구든 자기 마음을 이야기했으면, 그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가로로 돌려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한 기현이는 혼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별것 아닌 문제를 통해 나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 고마운 존재였다.
“혹시 기현이가 가로로 그리면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을까? 선생님은 기현이에게 가로로 그려도 된다고 하고 싶은데.”
내 제안에 절반 이상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남학생 두 명은 쿨하게 상관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자기 그림에 집중했다. 몇 명이 잠시 입을 삐죽거렸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기현이의 가로 그림은 아이들에게도 허락을 받은 셈이다.
긴 숨을 참고만 있던 효빈이가 들릴 듯 말 듯 ‘하’ 한숨을 쉬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현이는 맨날 지 마음대로네.”
그 소리가 내 귀에만 들린 게 아니라 기현이 귀에도 닿은 모양이었다. 기현이가 효빈이를 쏘아보며 말한다. 그 말이 아주 당차고 거침없다. 오히려 멋지기까지 하다.
“야, 김효빈! 내 마음이거든.”
마저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사이로 효빈이를 잠깐 복도로 불러내 마음이 어떤지 물어본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는 효빈이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두 번째 대답도 어김없이 괜찮단다. 지금이라도 가로로 그리고 싶으면 이야기하라고 하니, 그것도 괜찮다고 한다. 이미 그리던 게 있으니 그냥 세로로 그려도 된단다. 하지만 그 말투 어딘가엔 진짜는 아니라는 기색이 스쳐 지나간다.
속마음은 가로로 그리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아니냐 물으니, 선생님이 세로로 그리라고 하셨으니 세로로 그려도 상관없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렇게 말하는 효빈이의 얼굴엔 익숙한 듯한 체념이 스친다.
나는 효빈이가 내린 결정보다, 그 아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 속에 담긴 솔직한 마음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그런데도 효빈이는 딴소리만 했다. 다른 건 다 잘하는 모범생이지만,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데에는 영 소질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학교 다닐 때 나도 효빈이 같은 아이였다. 선생님이 하라는 대로 잘 따르고, 규칙도 잘 지키는 모범생. 모범생이 되려면 자기 마음은 접어두고 생각도 내려놓는 게 유리했다.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반대 의견을 제시하거나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모범생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설명한 대로 잘 듣고, 빈틈없이 수행해 내는 것이 모범생의 기본 자질이라 여겼다. 내 마음, 내 생각이 클수록 힘들었다. 그러니 마음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도 없었다. 익숙해지다 보니 내 마음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마음은 무시한 채 나를 옥죄며 살아왔다.
세상이 모두 모범생으로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문제를 제기하는 투덜이, 상황을 비틀어 보는 삐딱이가 있어야만 역사가 발전해 나가지 않았던가.
기현이가 부러웠다. 그 자유롭고 당당함이, 자기 마음에 충실한 태도가. 투덜거리는 것 같아 보여도 언제나 자기 마음을 먼저 이야기하며 허락을 구하던 아이였다. 거절당해도 쿨하게 받아들이는 대인배였다. 그런 자유로움, 그리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거절 또한 담담히 수용하는 미련 없는 태도가 부러웠다.
늘 모범생일 필요는 없었다. 정말 모범적으로 살고 싶었다면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내 목소리를 잘 따라야 했다. 그것이 우선이었어야 했다. 주어진 것을 체념하듯 그대로 받아들이던 나에게는, 조금 틀어보고 꼬아보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려면 늘 내 마음이 어떤지를 챙겼어야 했다.
그날 결국 나는 기현이에게 가로로 그려도 된다고 허락했다. 기현이의 선택이 다른 누구에게도 심각한 손해를 끼치지 않으니 아무 상관없다고 했다. 참고 참던 효빈이가 소심하게 손을 들더니, 그건 불공평하다고 한마디 했다. 나는 효빈이의 그 반격이 반가웠다.
마음을 꺼내 보지도 못하고 자기 생각을 외면하며 살아온 효빈이의 열세 살 인생. 어차피 내 마음대로 안 될 거라면, 외쳐볼 용기라도 있었으면 했다. 효빈이가 내뱉은 그 한마디는 작지만 진심이 담긴, 아주 달고 반가운 마음의 소리였다.
“어쨌든 네 마음을 표현해 줘서 고맙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 나의 대답.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건 효빈이 네 마음이고, 허락하는 건 내 마음이야.”
나도 당당하게 외쳐본다.
인생살이가 호락호락하지 않아도, 가끔은 실패와 거절이 뻔해 보여도 쿨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 결과를 감당할 만큼의 용기가 있다면, 질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당연하다는 듯 규칙만 따르던 모범생이기보다는, 이제는 이렇게 살고 싶다. “내 마음이다.” 외칠 수 있는 인생 말이다.
그것이 바로, 다른 사람 눈치 보지 않고 내 마음을 먼저 챙기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