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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아빠

by 강혜진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왔는데 아빠가 집에 있었다. 훤하게 밝은 대낮. 해가 지기도 전에 집에 있는 아빠가 낯설었다. 술 냄새가 풍겨왔다. 아빠는 혀가 꼬부라져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할 정도로 잔뜩 취해 있었다. 나는 그날 술이 얼마나 사람의 이성을 무너뜨리는가를 직접 경험했다.

아빠는 내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내 손목을 으스러지게 쥐고는 다짜고짜 버스정류장으로 날 끌고 가셨다. 몇 번인지 번호도 확인하지 않고 나를 버스에 태우셨다. 하교 시간이라 그랬을까 버스 안에는 교복 입은 학생들이 가득했다. 아빠에게서 풍기는 술냄새와 이글이글 벌겋게 충혈된 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취해 술기운을 한숨에 섞어 연거푸 뱉어내는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빠와 내가 버스에 오르자, 마치 홍해가 갈라지듯 사람들이 비켜났다.

체면 생각해 평생 속에 있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던 아빠는 버스 안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도 않는지 내 어깨를 꽉 붙들고는,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당신 귀에도 크게 들리라고 그러셨는지, 아니면 알코올 때문에 뇌기능에 오류가 나서 스피커 볼륨장치가 망가졌는지, 버스가 떠나가라 큰 소리로 물어보셨다.

“아빠하고 엄마하고 이혼하면 너는 누구랑 살 거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술에 취한 아빠의 모습, 사람들 다 쳐다보는 데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떠들어대는 아빠의 망가진 행동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그런데 아찔했던 그 찰나에, 아빠의 흐트러진 모습보다 나를 더 당황하게 했던 것은 ‘이혼’이라는 단어였다. 엄마, 아빠가 다투고 외가와 친가 어른들 사이의 분위기가 차갑다는 것은 이미 나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이혼이라니.

목적지는 엄마가 사는 월세방이었다. 한동안 집을 나가 혼자 방을 구해 살던 엄마가 어디 있는지 아빠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듯했다. 그날 내가 그 월세방에서 엄마를 만났는지 말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집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정말로 편부모 가정의 자녀가 되었다. 나와 내 동생이 동네 골목을 지나가면 우리 집 사정을 뻔히 아는 어른들은 딱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셨고, 우리 뒷모습을 보며 소곤소곤 입을 가리고 마치 해서는 안 되는 말을 나누는 사람들처럼 아주 오래도록 이야기하셨다. 진짜로 너희 엄마 집 나갔냐, 너희 엄마랑 아빠랑 이혼했냐 친구들도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해댔다. 자존심 센 나는 그 모든 것이 싫었다.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쁜 아빠는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 아니었다. 밥 짓고 빨래하는 할머니는 나와 내 동생을 사랑으로 보듬어 주셨지만 다리가 불편하셨고 오래 묵은 폐병으로 밤마다 밭은기침을 발작적으로 하셨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을 쌕쌕거리며 얼굴이 파래지는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나와 내 동생은 일찌감치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밖에 없었다. 제 앞가림 잘해야지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면 안 된다는 마음은 우리를 일찍 철든 착한 아들딸로 자라게 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혼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 젖어 정서적으로 미숙하게 자랄 거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성격이 까칠하거나, 비행을 저지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어른으로 자랄 거라 여기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이혼 가정의 자녀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비록 혼자가 된 부모라 해도, 중심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 자체로 자녀에게 든든한 길잡이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직접 보고 느끼며 자랐다. 부부로서는 각자의 길을 가게 되었더라도, 부모로서의 역할만큼은 끝까지 책임지고 지켜나가는 것이 아이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자라게 할 거라는 데에는 일말의 의심이 없다. 나는 그런 믿음 속에서 자라왔다. 아주 잠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준 적이 있긴 했지만, 지금의 내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묵묵한 뒷모습이 큰 몫을 했다.

아빠는 그날 이후 일흔 나이까지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으셨다. 어렸을 때부터 배웠던 양복 만드는 기술이 큰돈을 벌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는 막노동을 하셨다. 인색하다 싶을 정도로 검소하게 살았지만 빚 한 푼 없이 아들, 딸을 키우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셨다. 이혼을 겪고 살길이 막막해졌을 때도 일탈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셨다. 내 평생 아빠의 망가진 기억은 술에 취해 나를 버스에 태웠던 그 하루밖에 없었다. 아빠는 나약하거나 나태한 사람이 아니었다. 힘든 일을 겪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출근하고 일했다. 자기 것 챙기는 것보다 남들에게 베푸는 것을 더 마음 편히 여기셨다. 당신 몸이 편하자고 남들 힘든 걸 모르는 척하는 분이 아니셨다.

어렸을 때는 그런 아빠가 답답할 때가 많았다. 남들 좋은 일은 다 하면서도 정작 자기 것은 야무지게 챙기지 못하셨으니 말이다. 매일 고생만 하고 손해만 보는 아빠가 어리석어 보여서 아빠만 보면 화를 내곤 했다. 철없던 어린 시절엔 말이다.

이사를 하면서 예전에 다니던 학교까지 아들과 딸, 두 아이를 데리고 출퇴근을 한 적이 있었다. 아들은 3학년, 딸은 1학년이었다. 2020년 5월에 이사하고 이듬해 3월, 새 학년이 시작할 때까지 우리는 함께 출퇴근하며 같이 라디오를 듣고, 같은 노래를 부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왕복 두 시간, 창밖으로 사계절 풍경을 바라보고 매일 감탄하면서 아이들과 고민을 들어주었다.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은 아이들에게 엄마인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엄마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바로 외할아버지야.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아는 사람 중에 제일 착한 사람이야. 법이 없어도 절대로 남의 물건을 빼앗거나 사람을 해치지 않을 사람. 뼛속까지 좋은 사람. 예전에 엄마가 한창 사춘기일 때는 할아버지가 너무 어리숙해 보이고 늘 손해만 보는 것 같아서 답답할 때가 많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세상에 외할아버지처럼 순수하고 착한 사람만 있다면 뉴스에 기사거리가 없어서 아마 9시 뉴스는 프로그램을 폐지해야 할지도 몰라. 엄마가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외할아버지 닮아서 그런 거야.”

김창옥 강사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아빠는 한 번도 딸인 나의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훈수 둔 적이 없었다. 무심하다 느껴질 정도로 모든 것을 나 혼자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셨다. 내가 한 선택이 무엇이든, 전적으로 맡겨두셨다. 내가 아빠를 존경하는 이유는, 아빠의 성실함도, 선함도, 나이와 상관없이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는 모습도 아니었다. 바로 나를 믿고 기다려 주며 내가 독립할 수 있도록 키워주셨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들에게 우리 아빠처럼 멋지고 존경스러운 부모가 되어 주고 싶다는 큰 욕심을 품고 산다. 아이들을 믿고 자기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도록 어떤 선택이든 믿고 응원해 줄 수 있는 부모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꼭 용기 내어 말하고 싶다.

“아빠!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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