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쓰이는 일이다. 그 대상이 가족이라면, 나를 존재하게 했던 부모라면, 고통은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미워하던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게 되는 것은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축복이다.
엄마를 미워하고 살았다. 엄마는 나에게 몹쓸 사람이었다. 입에 이름을 올리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와 동생에게 한 마디 설명도 없이 집을 나가버린 엄마는 그것만으로도 빵점이었다. 늘 자식새끼 버리고 간 며느리 푸념을 늘어놓는 할머니와, 엄마에 대한 기억은 모조리 지운 것처럼 보였던 아빠 앞에서 나는 엄마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 엄마가 사무치게 미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집으로 걸려 온 전화, 엄마였다. 왜 전화했냐고 되물으며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다. 이제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하니까 이런 전화로 신경 쓰이지 않게 해달라고 말했다. 던지듯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날 이후로 엄마는 나와 내 동생 앞에 찾아온 적도, 전화 한 통 한 적도 없었다. 내가 얼마나 빛나고 훌륭하게 컸는지 엄마는 모를 것이다. 공부는 1등을 놓친 적이 없고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장을 휩쓸어 와도 엄마는 꿈에도 모르고 지냈을 것이다.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열심히 학창 시절을 보냈다. 내 인생에 엄마 따위 없어도 아무 상관없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다음에 엄마를 다시 만난다면 엄마가 이혼을 결심헀던 그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고3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전화가 한 통 걸려 왔다. 이종사촌 언니였다. 수능 쳤으니 이모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했다. 평생 왕래도 없던 이모네에 놀러 오라는 말에, 공부하는 데 신경 쓰일 일 없을 때까지 기다렸던 엄마가 우리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다. 이미 교대 수시에 합격해 있었다. 그거면 엄마에 대한 복수로는 충분할 것 같았다. 공부에 신경 쓰이니 전화하지 말라고 했던 말에 떳떳하게 내밀 수 있는 결과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가진 것 중에 가장 좋아 보이는 옷을 입고 동생과 이모 집에 가는 버스를 탔다. 가는 동안 동생과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못했다. 내가 앞서고 동생이 뒤따라오는 내내 정적이 흘렀다.
이모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모습이 많이 변했지만 분명히 우리 엄마였다. 언젠가 이 순간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때가 오면 당당하게, 그리고 담담하고 깍듯하게, 그러면서도 차갑고 냉정하게 그녀를 대해야겠다고 머릿속으로 여러 번 시뮬레이션을 했었다. 누구보다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것만큼 멋진 복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복수는 준비해 두었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엄마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고 왈칵 내려앉아 버렸다. 나도 모르게 엄마를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 우는 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목구멍에 힘을 꽉 줘 봐도 결국 울음소리는 담장을 넘었다. 동생은 그저 멀찍이 서서 그런 엄마와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엄마에게 어떻게 지냈냐고 묻지 않았다. 왜 우리를 두고 갔느냐고도 묻지 않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저녁, 이모집 거실에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밥을 먹고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하고 또 헤어졌다. 10년이나 넘게 떨어져 살던 엄마와 그렇게 재회했다. 미움과 원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저 아직은 그 감정을 꺼내어 볼 때가 안 된 것 같아 가슴 깊숙이 덮어 놓았다. 공부하는 데 신경 쓰이지 않게 해 달라던 나의 차가운 말에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던 것은 엄마가 나에게 한 배려였다고 생각했고 엄마가 받은 벌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떨어져 산 긴 기간만큼 엄마와 나 사이에 깊은 정은 없다. 다정하고 친밀한 사이가 되기도 어색했다. 명절날, 어버이날, 생신날 안부 전화를 하고 별일 없냐 묻고 지내는 게 다다. 이미 재혼해 새로운 가정이 있는 엄마에게는 새로운 남편도 있고, 내 또래 아들도 둘이나 있었다.
엄마를 만날 때마다 평생 혼자 나를 길러 준 아빠에게 죄책감이 들었다. 웃으며 떠들다가도 아빠가 떠올라 한껏 즐길 수가 없었다. 엄마 집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고 먹을 때마다 혼자 계신 아빠 생각이 나서 금방 숟가락을 놓고 자리를 뜨곤 했다.
그쪽 집안 아들 둘이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랐다는 것, 엄마와 재혼한 아저씨가 엄마를 잘 보살펴 주신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저씨는 나를 딸이라 부르며 잘 대해 주셨지만 나는 여전히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부른다. 친구 부모님, 학부모님께는 아버님, 어머님 잘도 말하면서 엄마가 재혼한 그 아저씨한테는 아버지라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우리 아빠에게 죄짓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서먹서먹한 관계가 최근까지도 계속 이어졌다.
살면서 가장 답답하고 해결이 안 되는 문제가 무엇인지 묻는 마음 학교 선생님께 이렇게 답한 적이 있다. 엄마를 오롯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엔 아빠가 너무 서운할 것 같아서 엄마를 마음 놓고 만나지도, 엄마를 만나 맘 편히 웃지도 못한다고 말이다.
“혜진이 아빠는 혜진이가 행복을 멀리 밀쳐 내는 걸 바라지 않으실 거야. 아빠에게 미안해서 행복을 미루는 거라면 더더욱 말이지. 아빠는 혜진이가 어디에 있든 행복하길 바라시지 않겠어? 그러니까 불행을 선택하지 말고 행복을 선택해.”
마음 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딸이 행복해야 아빠도 행복할 거라고. 자기에게 미안해하며 행복을 자꾸 미루는 딸을 바라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 엄마와 만남도 마음껏 즐겨야겠다고.
결혼해 남편이 생기고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기르며 여자로서 삶을 살아보니 엄마가 이해된다. 가난한 시집살이, 시집 식구들을 모시고 살며 사회생활을 했던 엄마의 이십 대가 얼마나 서럽고 힘들었을까. 다정하지 못한 남편과 살며 속상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잘한다, 고맙다 이야기 건네지 않는 시댁 분위기에 얼마나 외로웠을까.
한 인간으로서, 아빠로서, 우리 아빠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그리 훌륭한 남편감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나도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났다면? 글쎄 마냥 행복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자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서, 엄마가 더 깊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 TV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효리가 친정엄마와 여행하며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고 오래 묵혔던 응어리를 풀어나가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부러웠다. 나도 엄마랑 언젠가 단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랑 둘이 술 한잔 하며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들, 엄마가 나를 떠나 있을 때 어떻게 지냈는지 들을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나도 엄마 없이 얼마나 서러웠는지, 엄마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전할 기회가 있기를.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 다 털어버리고 엄마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자리를 가졌으면. 곧, 여행 약속을 잡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