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도로 끝에는 행복도 있겠지.
아들 하나 딸 셋
남편은 나보다 6살이 많다.
딸만 넷에 둘째인 나는 미지의 친오빠 같은 푸근함에 끌려 결혼을 결심했다.
든든하고 변함없을 것 같은 믿음 또한 만나는 내내 보여주었기에 마음이 열린 이유였다.
남편에게는 누나 한 명과 여동생 두 명이 있다.
나에게 세명의 시누이는 나보다 연상들이다.
그러니까 밑에 여동생들 입장에서는 오빠의 아내가 본인들보다 나이가 적다는 의미다.
결혼하기 전 인사 차 시댁에 방문했을 때부터 그저 시누이가 아닌 언니들 같은 마음으로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온전히 나의 희망이었다.
먼저 결혼 한 선배로써의 도움도 받고
고민 있을 때 통화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는
정말 친자매 같은 이상의 꿈을 꾸었다.
나는 내성적이지만 특유의 붙임성도 있었고 두루두루 친할 수 있는 모가 나지 않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평소 주변 어른들은 그런 나를 예뻐해 주셨고
두어 살 많은 가까운 언니들도 친동생처럼 대해 준 적이 많아 특히 새로운 가족을 이룬 경우이니 더욱 친밀감 있게 지내길 바랐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생각대로 살갑게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지 못했다.
다른 도시에서 각자의 생활에 충실한 것도 있었겠지만 가족이라는 끈끈함이라고 해야 할까.
부모, 남매와 뜸한 꼭 만나야 할 때가 아니면 소원한 것도 사실이었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그런 관계도 좋다고 할 수 있을까.
가까이 살면서 이 간섭 저간섭 당하며 사는 시월드 보다 낫다고 한다면 그 점을 오히려 고마워해야 하는지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에 대한 미움 때문에 집안이 늘 그늘졌었다고 한다.
각자 가정을 이루면서 이기적이고 고집 센 무능력한 가장에 대한 자식들의 반기가 그제야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반기가 나에게도 향할 줄은 몰랐다.
아이가 생기고 가족 모임이 있을 때 만나곤 하면 나를 부르는 호칭이 항상 '**엄마'였다.
'새언니'가 아닌 첫아이의 이름을 붙여 불렀다.
내가 **엄마가 맞긴 하지만 엄연히 오빠의 아내인데도 한 번도 언니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꼬박 오빠라고 부르는 이유에 내심 그 사소한 호칭이 맘에 쓰이긴 했나 보다.
그 가까워지기 어려운 미묘한 단어가 마음에도 행동에도 어느 순간 서서히 거리감으로 선이 그어졌다.
그때는 '왜?'라는 의문보다 습관이 되지 않아서였을 거라고 위로했다.
억지로 부르는 게 불편한가에 더 치중이 되어 예의건 성격이건을 떠나 시간이 지나면 바로 잡힐 거라고 믿었다.
결혼 27주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호칭은 ing이다.
그러다 보니 말 섞기도 어색하고 마음의 벽은 하나 둘 두텁게 쌓이기 시작했다.
시부모님께 잘하고 싶었다.
그게 친정 부모님께 욕되지 않는 일이기도 했지만 딸 같은 며느리가 되고 싶었다.
신접살림을 시댁에서 했기 때문에 서로 부딪히는 일이 생기면 불편함이 미움으로 변질되기에
그냥 어른들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고 사는 게 편할 것 같아서였다.
시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시아버지의 일방적인 태도에 시어머니가 늘 떠 받쳐 주고 원하는 대로 불평 없이 들어주는 편이다.
그렇게 일생을 살아오셨고 그게 싸우지 않는 방법이라고 착각하셨다.
불평불만의 화살표는 오로지 시어머니를 향한 트리거였다.
사람은 원하는 걸 가졌을 땐 더 큰 걸 원하는 법이니까.
그런 일상 하나하나를 보고 자란 자식들의 가슴에는 미움이라는 상흔이 깊게 파여 있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