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딜레마에서 온

화양연화는 순간이고

by 준익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대학 졸업도 하기 전에 대기업에 줄줄이 합격해 최상위 결과만 남겨놓고 행복한 고민도 했었다.

누구나 부러워할 승무원이 되었을 땐 가족뿐만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었으니까.

몸이 안 좋아 고향에 요양을 왔을 때는 미인대회 출전도 권유받았다.

친언니도 출전 경험에 모델 활동도 하고 있던 때라 지역 높은 분들의 전화통화도 줄을 이었다.

객관적 시각에서도 끼가 없고 깜냥도 안된다는 걸 알기에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을 만나 결혼을 한다고 하니 집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나이도 많지 않았지만 어렵게 들어간 직장생활도 마음껏 하지 않고 뜬금없는 결혼선언에 부모님은 그날로 마음의 병을 앓았다.

그땐 몰랐던 화양연화는 짧았고 내가 선택한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 꽃이 되는 순간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첫째 아들을 임신하고부터 우울증이 왔다.

미용실을 하시는 시어머니와 사업을 하는 남편이 아침에 출근을 하고 나면 오롯이 혼자였다.

가끔은 친구들이 보고 싶다고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예쁘게 치장을 하고 각자의 꿈을 위해 살아가는 친구들과 부른 배를 안고 출산 후를 고민하는 나는 이야기 주제도, 만나고 싶은 장소도 달랐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연락도 뜸해지고 시댁이라는 공간에서 혼자만의 고립으로 마음이 시들어갔다.

지금처럼 휴대폰으로 연락을 하던 때도 아니어서 외로움이 가장 컸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지금의 나를 보여주기 싫었고

하루가 침묵 속에서 숨만 겨우 채우는 의미 없는 공기 같았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서 구조선을 기다리는 조난자처럼 문을 열고 들어 올 남편만이 유일한 숨통이 되었다.


한 집에 같이 계시는 시아버지가 나에게만은 잘해주셨지만 워낙 까탈스러우셔서 마음이 불편했다.

외출이라도 하시는 날엔 그나마 나았는데 그럴 때면 항상 약주를 드시고 왔기에 더더욱 집안이 시끄러웠다.

일을 하시고 퇴근하신 시어머니께 온갖 요구를 하셨다.

하루저녁에 찌개나 국을 5가지나 끓였지만 결국에는 중국집에 전화를 해서 요리를 시킨 적도 있다.

그것도 입에 대지 않으셨지만.

그런 날에는 시아버지와 남편사이에 고성도 오갔다.

불안한 마음과 안정적이지 못 한 보금자리에 스트레스도 커갔다.

그러다 시누이들이 오는 날에는 반갑기도 했었다.

임신 막달이 되어 몸도 마음도 불편할 때쯤 오래간만에 떠들썩한 집안 분위기에 기분도 고조되었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나간 사이 산모인 나는 피곤한 몸이 되어 먼저 잠자리에 들었다.

큰방에 8명이 모여 자야 해서 구석 쪽에 몸을 뉘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외출하고 돌아온 시댁식구들 소리가 들렸다.

이불이 모자라니 있는 거 덮고 자거라. 좁겠지만 군데군데 끼어서 자면 잘만할 거다.


시어머니께서 장롱 안에 있던 이불을 몇 채 가져다주셨나 보다. 그러자

악! 냄새. 이게 언제 거야?

막내 시누이가 짜증을 냈다.

옛날 이불들을 쓸 일이 없어 장롱 안에 오래 보관하니 묵은 냄새가 났나 보다.

그런데 구석에 누운 내가 덮고 있던 이불을 살살 당기더니 그 묵은 이불을 나에게 덮는 게 아닌가.

나는 자는 척했지만 그래도 냄새에 민감한 산모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속이 상했다.

이 사람들은 배려라는 게 없구나.


밤새 잠을 설치고 날이 밝자 내게서 뺏어간 이불을 덮고 신랑이랑 붙어 자는 모습에 화가 났다.

하지만 나는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는 시댁 사람들뿐이고 내가 불만을 이야기해 봐야 핑계만 들을 것 같아서였다.

속으로 삼키고 애써 외면했던 시간들로 속앓이를 뱉어내지 못한 게 그때부터였다.


앞에서는 선한 얼굴을 하고 뒤에서는

아니~임신은 자기 혼자만 했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내 말에 남편이 슈퍼로 뛰어가는 모습을 보고 하던 말이었다.

종류대로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같이 먹으라고 권하자

임산부 많이 먹으라고 해. 우리가 뺏어 먹는 기분이잖아.

뭐가 그리 불만이고 마음에 안 드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결국 그날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았고 요즘도 특정 제품을 보면 그때 그 말이 떠올라 가슴에서 울컥 서러움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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