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이의 상담일기. 제 3화.
상담 선생님을 만나다.
선생님에게 연락이 왔다. 몇 번의 엇갈림 끝에 듣게 된 선생님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우아했다. '~답다'는 말 참 싫어하지만 타인의 마음을 찬찬히 읽어낼 줄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말투에 괜히 더 신뢰가 갔다. 선생님은 김포에 사신다 했다. 경기도 남쪽에서 가기엔 꽤 먼 여정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만나뵙고 싶었다. 소개해준 P가 선생님이 바빠 바로 약속잡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해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주 일요일은 어떠냐고 하셨고 빨리 뵙고픈 마음에 좋다고 했다.
선생님은 상담센터에서도 근무하시지만 주로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계셔서 우리의 접선장소는 김포의 어느 스터디까페로 정해졌다. 김포공항 말고는 아는 게 없는 생경한 도시에 나의 가장 내밀한 마음을 얘기하러 가다니, 이제 내게 김포는 전과는 전혀 다른 곳으로 기억될 것이었다.
약속시간을 위해 일찍 나온다고 나왔는데 낯선 곳+길치 콤보가 적극적으로 작동하는 바람에 같은 곳을 몇 바퀴 돌았다. 급하게 뛰어간 것은 맞았지만 늦어서 죄송한 마음을 담아 도착 몇 미터 전부터 조금 더 연극적인 헥헥거림과 함께 스터디룸 문을 두드렸다. "반가워요. 오느라 고생했죠? 숨 좀 돌리고 물 한 모금 마셔요." 선생님은 미안할 것도 급할 것도 없다며 여유로운 미소로 나를 보았는데, 그 차분함이 감사하고 좋았다.
아주 오래 전부터 나는 정지영 아나운서 같은 말투가 갖고 싶었다. 기분좋은 나른함과 우아함이 가득 묻어나고 늘 평온한 톤으로 문장을 안정되게 이어나가는 세련됨이 부러웠다. 문장문장마다 감정이 뚝뚝 묻어나고 감정이 훅 올라올 때는 쉴 새 없이 염소를 몰고 다니느라 청자에게 마음을 투명하게 들켜버리는 내 자신이 너무 싫어서였다. 세련되고 우아하게 잘 포장하고 싶었다. 그런 말투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훨씬 더 근사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급할 것 없어요. 천천히 시작합시다."라고 말할 때 어찌나 나긋나긋 우아하던지. 나만 정지영 아나운서 못 된다 엉엉.
"왜 상담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나요?" 선생님의 첫번째 질문이었다. 글쎄.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니, 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늘 내 자신이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고 나를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관심이 갔다. 더구나 믿고 좋아하는 P가 인생에서 이런 심리검사 한 번은 받아보면 좋다는데 혹하지 않을 수가. 그런 말들을 선생님께도 늘어놓았다. 꼭 상담을 받고 싶어서는 아니었다고. 선생님은 빈 A4용지에 내가 뱉은 말들을 빼곡하게 적었다. 나에게 관심이 많아서, 더 잘 알아보고 싶어서.
"이런 이유들로 연락을 했던 거군요." 선생님이 내가 말한 이유들을 되짚어줄 때 왠지 시험받는 기분이었다. 내 안에 더 큰 이유들이 감춰져 있는데 솔직하지 못해서 그런 두루뭉술하고 재미없는 너무도 일반적인 말들로 포장하는 거구나, 라는 해석이 숨어있는 것 같았다. 그 해석은 결국 내가 타인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었지만 당시엔 괜히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는 평소 내 감정을 꽤 잘 들여다보고 사는 사람인데. 상담이 급할 만큼의 마음은 담아두고 살지 않는데. 그렇게 자기변호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의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도 맞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나는 선생님께 솔직하지 못했다. 솔직하기 싫어 연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숨겨두었던 것들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내 마음에 솔직할 수 없었다는 게 제일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선생님은 일단 만나서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검사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테스트 해야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만남을 요청했던 것이고 다음 주까지 지금 나눠주는 세 가지 심리검사를 완성하여 사진으로 찍고 문자로 보내달라고 했다. 나를 정말 제대로 이해할 기회가 될 것 같은 기대감에 빨리 결과가 나오길 검사지를 받아들었을 때부터 간절하게 바랐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기로 했고 나는 열심히 다음주 일요일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