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이의 상담일기. 제 5화.
누구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나요.
본격적인 상담을 시작하기 전 받은 심리검사에서 내가 절대적인 내향형 인간이란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난 정말 낯선 곳에, 그것도 '혼자' 가야 하는 상황이 너무 끔찍했다. 거기 있는 나를 상상하는 자체만으로도 괴로워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전날 밤에는 그렇게 좋아하는 잠도 저절로 거리두기가 됐다. 쓸데없이 풍부한 상상력으로 극단의 부정적 상황까지 설계해놓으면 개미지옥처럼 그 상상에 갇혀 새벽녘까지 스스로를 괴롭혔다. 현실에서는 내 상상의 끝까지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매년 낯선 환경에 놓여야 했던 학창시절엔 의식처럼 그 상상을 놓지 못했다.
어른이 되고는 낯섦을 선택할 수 있어지면서 굳이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아 변화를 기피했다. 만나던 친구들, 고정된 상황, 늘 하던 것들과 가던 곳들. 기본값으로 설정해놓은 것들에서 크게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 낯섦을 겪느니 차라리 포기하고 말지. 그런 마음으로 꽤 오랫동안 살았다. 새로움이 주는 스트레스가 지독히도 컸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움이 없는 환경에서는 나도 그저 그런 사람밖에 될 수 없다는 불안이 자라기 시작한 언젠가부터는 마음 속 용기를 가득 끌어모아 낯섦을 선택해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아주 미미한 시도들이었지만 내딴엔 꽤 큰 도전이었다. 무언가를 배우기 위한 강의를 신청한다거나 새로운 모임에 가입한다거나, 원래 가지 않던 길로 혹은 낯선 까페 등의 장소에 가본다거나. 낯선 상황에 놓인 내가 마치 영화에서처럼 정신은 분리되어 나를 내려다볼 수 있다면, 이렇게 재미없고 무매력인 사람이 다 있나 탄식하지 않을까? 가끔 그런 쓸데없고 풍부한 상상력을 이렇게 소환해오곤 했다. 알고보면 말도 꽤 잘하고 장난도 잘 치고 웃음소리도 크고 흥도 많은 사람인데, 그걸 선보이기까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며 고단한 탐색전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 힘겨웠다.
생각해보면 낯선 상황 자체보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긍정적인 모습과 가장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는 나 사이의 괴리감을 견디기 어려워서 그런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나를 마주하는 건 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특히나 내가 생각하기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달변가이거나 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집단에서 발언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더욱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마음의 준비를 하고 가도 입만 옴싹옴싹 하다 한 마디도 못하고 돌아오거나, 이 타이밍에 이런 말을 해도 되려나 고민고민하다 참고 있으면 다른 사람이 내 머릿속에 들어왔다 나간 건가 싶게 동일한 발언을 풀어놓아 혼자 안타까워하는 일이 생겨났다. 집에서 혼자 이불킥을 하며 속상해해봤자 알아주는 이 없는 고독한 한탄이었다.
주눅들고 자신감없는 못난 내가 너무 싫은데 쉽게 나아질 일도 아니니 나의 가장 큰 취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상담 선생님께 그런 얘기들을 줄줄 털어놓았더니 선생님은 내가 '누군가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무척 큰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 기준들에 굳이 맞출 필요가 없는데 말이죠."
그러게. 왜 그렇게까지 상대의 눈치를 보느라 나를 구깃구깃 못나게 접어놓고 있을까. 타인에게 근사하게 보이고픈 욕심을 놓지 못해서, 그런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이면 단물이 빠지고 또 빠질 때까지 계속해서 곱씹고 자책했다.
상담을 통해 그 기준점에 지대한 영향을 준 사람이 엄마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엄마가 참 미우면서도 그의 애정을 갈망하느라 이렇게 많은 것들을 엄마의 모양으로 빚어왔다는 것이 새롭게 놀라웠다. 나는 이제서야 엄마와 조금씩 제대로 분리되는 작업을 해나가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