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15>
그렇게 그와 함께 한 벤쿠버에서의 첫 날 밤이었다. 설렜고, 편안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만에서의 설렘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도 그랬을까, 알 수 없었다. 그저 또 그렇게 우린 또 함께 밤을 보냈다. 그의 집에서 함께 지내게 된 것은 그래서 잘못한 일이었다. 또 다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것만 같았고, 이렇게 같이 지내면서 나는 그에게 더더욱 빠져 들어 또 다시 힘든 시간을 보낼 것만 같았다.
새벽 2시쯤 잠이 들었고, 그 탓인지 10시가 다 돼서야 일어났다.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 자기 집으로 가서 출발하자던 건 핑계였나 싶기도 했지만 굳이 나는 궁금하지 않았다. 이래도 저래도 아무 상관 없었다. 그와 함께 있는 게 좋아서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얘기를 꺼낸다면 분위기가 이상해 질까봐 그런 것도 아니었다. 진심으로 아무 상관이 없었다. 이렇듯 저렇듯.
아침을 챙겨먹고 우리는 휘슬러로 향했다. 그 한시간 반 동안 운전하고 있는 그의 옆에서 재잘거리고 노래를 틀고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캐나다하면 생각나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데려와 준 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만큼.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아마도 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아마도 폴이 큰 이유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꽉 막힌 것 같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 바깥 풍경에. 단순히 그 풍경 때문에 가슴이 뻥 뚫린 것을 아니었으리라. 벤쿠버에 와서 느낀 많은 것들이, 내가 본 그의 많은 모습들이, 그리고 그를 보면서 변한 나의 감정이 나를 그렇게 느끼게 한 것이다. 운전을 하고 있는 그를 옆에 두고 나는 바깥 풍경을 보면서 "It's awesome!" 너무 멋있다! 를 연발했지만, 그 때 나는 단순히 경치만을 즐겼던 게 아니었다. 마음 속 많은 부분이 정리됨을 느꼈고, 필요없는 감정들이 씻겨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변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휘슬러에 도착해 연인인 듯 아닌 듯 우리는 시간을 보냈다. 손을 잡고 입을 맞췄지만, 오히려 나는 벤쿠버에 도착한 첫날보다 그를 원하는 마음이 적었다. 가까이 있었지만 멀었고, 친근했지만 또 멀었다. 하지만 슬프지 않았고, 우울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그 시간이 지루하거나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내 감정을 확실하게 알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빨리 그 감정을 정의내리고 싶지도 않았다. 벤쿠버여서 그랬을까. 나 역시 벤쿠버 사람들처럼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지고 있었나 보다. 그 여유로움 안에서 나 또한 나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영화관에 들러 영화를 봤다. 코미디 영화였고, 보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일상 같은 여행을 여기서 또 하고 있었다. 타이페이에서는 굳이 노력해서 일상 같은 여행을 했다면, 이 곳에서는 억지로 하지 않았는데도 일상 같은 여행이 되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일상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함께 한 영화 데이트도, 영화를 보고 함께 간 스카이 라운지 바에서의 데이트도 나쁘지 않았지만 떨리지는 않았고, 지겹지는 않았지만 미친듯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여자 친구가 아니었다.
그렇게 밍밍한 감정 상태로 돌아왔고, 그 날 밤 피곤했던 그는 먼저 잠들었고 나는 거실 소파에 누워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의 핸드폰이 궁금해졌다. 차에서 음악을 들을 때 그의 핸드폰 비밀번호를 알려줘서 틀었던 터라 비번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뭐 어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고 나는 문자를 보다가 그가 친구와 내 이야기를 한 걸 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