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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The F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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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Eun Apr 22. 2016

The Flight_17

<17> the last night



 벤쿠버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 나는 역시나 늦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12시가 다 되어서야 눈을 떴고, 그 또한 그랬다. 그렇게 우리는 게으른 마지막을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 바빠보였다. 랩탑을 열어 무언가를 서칭하는 듯 했고, 그런 그를 보며 뭘 하느냐 묻지 않았다.


 20대의 나는 궁금한 게 많았고, 질문이 많았다. 친구든 남자친구든 간에 그들에게 알고 싶은것들이 많았고, 그 관심을 모두 겉으로 표현했다.


 특히 남자친구에게는 더 했다. 숨김이 없었다. 밀당의 개념조차 잘 몰랐고, 굳이 그게 왜 필요한가 싶었다. 좋으면 그가 나에게 넘어져 올 때까지 숨막히게 당겼고, 싫으면 나가 떨어지도록 밀었다. 돌이켜보면 무척 운이 좋았다. 당기면 당겨와주고, 밀면 밀려나주는 좋은, 착한 남자들만 만났던 덕이었다. 그 덕에 왜 밀당이라는 것이 필요한 지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했던 건 대단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십대 후반 불같은 연애를 하면서 나는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진심으로 많이 좋아했었던 J를 만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너무나 좋아했지만 이렇게 안 맞을 수 없었던 그를 만나면서 밀당이 왜 필요한 건지, 그리고 진짜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그 사람을 위해 나 또한 변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을 배웠다. 안 맞는 게 어떤 것인지 그를 통해 배웠고, 연애를 하면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그와의 1년 반 즈음의 연애를 지나면서 나는 많이 변했다. 사람이 쉬이 변하지 않아 밀당의 고수가 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그 필요성은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 또한 알게 해 주었던 연애였다. 그리고, 나는 끝까지 가야 끝이 난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해 준 그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지금 벤쿠버에 와 있다는 걸 알면, 누구보다 나답다고 말할 그였다. 물론 지금은 번호조차 알지 못하는 서로이지만 말이다.


 그러고보면 시간이 답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가보다. 그와 헤어지고 그토록 힘들었는데, 몇 년을 힘들었는데도 나는 또 누군가를 만나 다시 설렜고, 다시 사랑을 할 마음이 생겼고, 또 이렇게 벤쿠버에까지 와 있는 걸 보면.


이렇게 나는 벤쿠버에서의 마지막 날을 맞았고, 폴은 랩탑으로 무언가를 하면서 그 날을 시작했고, 나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예전의 나라면 무얼 하느냐고, 같이 보자고 그에게 이야기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There will be a surprise one for you tonight!”

오늘 밤에 서프라이즈가 있을꺼야!


 나와 비슷한 그였다. 무언가를 준비해놓고 그걸 끝까지 숨기고 가지는 못하는 그였다. 말하고 싶어 근질근질 했을터. 뭔데? 뭔데? 하면서 물어봤지만, 무엇이든 상관이 없었다. 그토록 궁금한 것도, 미치도록 기대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이상했다. 벤쿠버에 막 도착했을 때만 해도 그가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는 어떻게 될지 궁금하고 기대되고 걱정되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들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심지어 벤쿠버에서의 마지막 날인데도, 평생 그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는 날인데도 이렇게 평온한 감정이라니. 사람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는 오후 느즈막히 집을 나섰다. 어둑어둑한 5시 즈음이었다. 그가 나를 데려간 곳은 그로스 마운틴에 있는 산 위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마치 한국의 남산 타워 위에 있는 엔그릴 같은 곳이었다. 좋은 분위기의,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었다. 그는 어떤 마음을 나를 그 곳에 데려갔을까. 벤쿠버에서의 마지막 밤을 나에게 어떻게 기억시키고 싶었을까. 이미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을꺼라고,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꺼라고 결심하고 있고 확신하고 있는 그는 어떤 마음으로 그 날 저녁을 보냈던 걸까.


 하지만 전혀 우울하지도, 진지하지도 않게 우리는 식사를 했고, 예의 가벼운 농담을 하며 연인같이 데이트를 했다. 어릴 때의 서로의 모습을 묻고, 서로의 학창 시절에 대해 궁금해하며 타이페이에서처럼 서로를 궁금해 하는 대화를 했지만, 그 때만큼 나는 그가 궁금하지 않았다. 그도 그랬을까. 그 역시 나처럼 궁금한 척 했던 것일까.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벤쿠버에서의 마지막 날은 스펙터클하지 않게, 그리고 기억에 남을 만한 일 없이, 그렇게 지나갔다. 그가 어떤 생각인지 모른 채로. 그리고 그 역시 내가 어떤 마음인지 모른 채로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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