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라델피아는 그 어느 도시보다도 벽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이다. 우리가 묵었던 시청 앞 메리어트 호텔 코너 벽에도 페인팅 작업이 한창이었는데, 이렇게 대형 건물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장면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오늘날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나 행사로 인정받고 있지만 오래전에는 지저분한 낙서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말 멋진 작품들도 많았기에 사람들은 이런 에너지와 열정을 제대로 발휘해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1984년 '필라델피아 벽화예술단체 Philadelphia Mural Arts' 가 탄생했고, 매년 다채로운 행사를 기획하기도 한다. 해마다 건물의 벽에 새로운 그림들이 그려지는 필라델피아는 갈 때마다 새로운 도시처럼 느껴진다.
이 필라델피아 뮤럴 아츠는 미국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 토마스 에킨스의 집이었던 마운트 버논 스트릿에 있다. 작가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을 위해 1874년 집을 증축해 4층을 스튜디오로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생을 마감한 에킨스는 유럽에서 그림 공부를 하고, 쿠퍼 유니온과 아트 스튜던츠 리그 오브 뉴욕 등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뉴욕에서 머물었던 것을 제외하면 생애 대부분을 필라델피아에서 보냈다. 그의 작품들은 매트나 필라델피아 뮤지엄 등지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그는 팬실바니아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을 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따뜻한 가족 그림을 주로 그린 매리 카셋 Mary Cassett을 동기동창생으로 만나 함께 화가로서의 꿈을 키워갔다. 강과 보트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초기작은 보트 그림이 많은데 필라델피아를 유유히 흐르는 스컬킬 리버를 배경으로 뉴욕에서 온 비글린 형제를 담은 그림, [The Biglin Brothers Raccing, 1872]는 영화나 책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림이다.
1875년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토마스 제퍼슨 의과대학에서 의사의 꿈을 꾸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그로스 박사의 임상강의 The Gross Clinic, 1875]는 바로 당시 저명한 해부학 교수 닥터 새뮤엘 그로스 박사 지도하에 허벅지를 해부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그 작품은 1876년부터 2006년까지 모교인 제퍼슨 메디컬 스쿨이 소장하고 있다가 2006년 $68 밀리언에 매매가 되어 진품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팬실바니아 파인 아츠 아카데미에 있고, 이곳에는 복제품만이 걸려있다. 에킨스는 1876년부터 팬실배니아 미술 아카데미에서 발런티어로 가르치시기 시작했고 1878년 정식 교수가 되었는데, 이곳에서 수제자이자 미래의 아내인 수잔 멕더웰은 만나게 된다. 수잔은 1875년 한 캘러리에서 에킨스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아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입학한 것이었다. 하지만 1884년 결혼 이후부터는 화가로서 보다는 뛰어난 화가의 아내로 내조에 힘쓰다가 남편이 세상을 뜬 후부터 그림에 몰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아내를 그린 [The Artist's Wife and His Setter Dog, 1884-1889]인데 책을 든 여인의 모습에 자주 등장하는 그림이다.
얼마 전 이 필라델피아 벽화거리가 워싱턴 포스트 지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전설적인 흑인 야구 선수 재키 로빈슨이 그려진 벽화였고, 필라델피아가 재키 로빈슨에게 사과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재키 로빈슨은 예전에 딸아이가 학교에서 배웠다고 해서 알고 있던 전설적인 야구선수였다. 재키 로빈슨은 최초의 흑인 메이저 리그 선수일 뿐 아니라 역사를 바꾼 중심에 있던 용기 있고 결단력 있는 영웅이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유년시절의 극심한 가난과 차별, 그리고 핍박으로부터 그를 지켜준 강인한 어머니가 있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사랑스럽고 다정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있었다.
재키 루스벨트 로빈슨은 1919년 1월 31일 조지아에서 다섯 형제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재키의 미들네임 루스벨트는 재키가 태어나던 달, 25일 먼저 세상을 떠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재키가 돌도 되기 전에 아버지는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갔고, 살길이 막막해진 어머니는 다섯 아이를 이끌고 캘리포니아 파사데나로 갔다. 당시 수많은 흑인들이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남부를 떠나 서부로 동북부로 떠나던 때였다. 야망이 있고 강단이 있던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해서 다섯 아이를 양육하고 돈을 모아 교육환경이 우수한 백인 거주지역에 집을 샀다. 학교에서 차별을 당하고, 동네에서 따돌림을 받고, 심지어 집 앞에서도 "떠나라"라는 협박과 놀림을 견뎌야 했다. 방황하던 사춘기를 보내던 재키가 잠시 갱단에 합류하기도 했지만 절친의 도움으로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운동 쪽으로 끼와 재능을 발산하기 시작했는데, 재키가 처음부터 야구를 한 것은 아니었고, 미식축구, 농구, 달리기, 야구, 테니스 등 거의 모든 스포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재키는 파사데나 주니어 칼리지를 거쳐 UCLA로 편입을 했고, 그곳에서 미래의 부인은 간호대학 신입생이던 아내를 만난다. 형 맥 로빈슨은 1936년 올림픽에서 출전해 제시 오웬스 다음으로 들어와 아깝게 은메달을 딴 인물이었다. 하지만 은메달을 목에 걸고 미국의 위상을 드높이고 돌아왔지만 흑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부였다고, 시대가 그러했기 때문이었는데, 만약 오늘날이라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졸업을 앞둔 1941년 봄 로빈슨은 자퇴를 하고 이듬해 군대에 자원한다. 1944년 7월 6일, 대학 재학 시 입은 발목 부상의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가기 위해 군대 버스를 탔는데 버스 운전사는 로빈슨에게 버스 뒤로 가서 앉으라고 명령했다. 로빈슨은 거절했고, 버스 운전수는 군경찰을 불렀고 로빈슨은 체포되었다. 로사 팍스의 몽고메리 버스 사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1945년 초 캔서스 시티 Monarch가 로빈슨에게 니그로 리그에서 뛰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는데, 미국에 야구가 생긴 1880년 이래로 흑인들은 그들만의 리그인 니그로 리그 Negro League에서만 뛸 수 있었다. 한 달에 $400을 받기로 하고 합류했고, 좋은 성적을 내는 대표선수로 활약했다. 그즈음 브루클린 다저스 대표 리키가 연락을 해왔다. 리키는 로빈슨에게 메이저 리그 선수로 뛰면서 차별과 멸시를 받더라도 순순히 받아넘기고, 부당한 대우와 차별을 받아도 맞서지 않을 배짱이 두둑한 흑인 야구선수를 찾는다고 말했다. 로빈슨은 고개를 끄덕였고, 월 $600 (오늘날 $8,000)에 합의를 했다. 그렇게 재키는 브루클린 다저스에 합류함으로써 미국 야구 역사의 흑백 라인을 무너뜨린 영웅적인 인물이 되었다. 1947년 4월 15일 수만 명의 관중이 모여든 가운데 최초의 흑인 야구선수로 메이저리그 데뷔를 했고, 그 경기를 관람하러 온 이들의 절반 이상이 흑인이었다.
그 당시 야구장에도 흑인과 백인이 입장하는 문마저도 따로 분리가 되어있었다. 당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재키 로빈슨을 어떤 식으로 잔인하게 차별했는지는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로 제작된 [42]에 상세하게 그려진다. 경기장은 물론이고 경기를 위해 필라델피아로 갔을 때 호텔에서마저도 재키가 속한 팀을 호텔 안으로 못 들어오게 거부했다. 필라델피아가 재키 로빈슨에서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내용을 신문에 실은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백인 리그에서 뛰게 되면 죽이겠다는 협박편지는 수도 없이 도착했고 생명의 위협도 많이 받았지만 재키 로빈슨은 굴하지 않았고,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군중의 야유에도 참고 또 참아야 했다. 로빈슨은 "흑인이 야구를 하는 게 대체 뭐 그리 잘못됐냐" 고 항변하는 내용의 글을 잡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언론의 중심이 되었던 그는 1949년 반미 청문회 HAUC (House of Representatives' Committee on Un-American Activities) 에까지 소환되어 증언을 해야 했다. [트럼보]의 실제 주인공 달튼 트럼보가 출석했던 청문회가 바로 이 청문회였다. 재키 로빈슨은 반미운동을 한 적이 없다고 분명히 밝혀서 오히려 인기를 얻었지만, 달튼 트럼보는 이 청문회 후에 감옥에 수감되고 작가로서 활동을 철저히 금지당하게 된다. 이후 생계를 위해 남의 이름을 빌려 유령작가로 글을 쓰면서 발표한 수많은 명작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오드리 헵번과 그레고리 팩 주연의 [로마의 휴일]이었다. 195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로빈슨은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가장 몸값이 높은 선수였다. 그해 [재키 로빈슨 이야기 The jackie Robinson's Story]라는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1955년 월드시리즈에 뉴욕 양키스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게 된다. 재키 로빈슨은 1957년 37세의 나이로 야구계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28살에 시작한 메이저리그 선수 생활 1947년부터 1956년까지 십 년을 브루클린 다저스에서 뛰었고, 여섯 번의 월드시리즈와 올스타 게임에 진출했던 그는 1962년 미국 야구 발생지라고 알려진 뉴욕 쿠퍼스타운 야구 명예의 전당 Baseball Hall of Fame 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재키 로빈슨이 청춘을 야구에 바쳤다면, 말년의 삶은 흑인 인권운동에 바쳤다. 특히 마틴 루터 킹은 재키 로빈슨의 결단력과 용기로부터 큰 감화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의 메이저리그 데뷔는 60년 이상 이어져왔던 야구 흑백 라인을 무너뜨린 전설이고 상징이라고 말했다. 또한 역사가들은 재키 로빈슨이 civil rights movement 의 촉발제가 되었다.
1960년 뉴욕 할렘에 Freedom National Bank를 세워 흑인들이 집을 살 수 있도록 모기지를 도와준다. 1970년에는 저소득 흑인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건축회사를 설립했고, 은행은 1990년에 문믈 닫았다. 1965년부터 는 ABC 야구해설위원으로 일했으며, 맨해튼에 있는 Chock full o'Nuts 부사장으로 일했다. 모든 것이 흑인 최초였다. 흑인 인권을 위해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는데, 리처드 닉슨, J.F. 케네디, 뉴욕 주지사 넬슨 락커 펠러 등의 인맥을 유지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리처드 닉슨을 지지한 그는 마틴 루터 킹의 수감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인 닉슨에게서 돌아서고 그때 도움을 준 케네디를 지지하고 케네디가 당선이 된다. 그리고 대통령 선거에 나온 넬슨 락커 펠러의 디렉터로 활약했다. 넬슨 락커펠러는 스탠더드 오일 락커펠러의 후손이자 뉴욕 주지사를 지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렇게 흑인인권을 위해 평생을 싸워온 인물인 재키 로빈슨은 사후 대통령 평화상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한다. 미국 최초 메이저리그 선수로서의 재키 로빈슨, 흑인 인권을 위해 자신을 바친 재키 로빈슨, 그런 그보다 더 큰 감동은 남편으로서 재키 로빈슨과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재키 로빈슨이었다. 평생 한 여인만을 열정적으로 사랑한 신의 있는 남편이었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아버지였다. 아내는 흑인 차별이 심하던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재키 로빈슨 마저도 백인 주거지역에 집을 구하는 어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한다. 세 아이들은 900명 이 되는 아이들 중에 유일한 흑인 3명이 자신들 형제였다고 말하고, 따돌림받고 불편한 시선이 집중되고, 견디기 힘든 시기였다고 말한다.
아내는 늘 바빴던 남편을 내조하고 세 자녀를 양육하면서도 공부를 계속해서 예일대학 간호학과 부교수가 되었다. 큰 아들 재키 로빈슨 주니어는 어릴 때부터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서 특수학교를 다녔고, 대학 대신 군대에 입대했다. 1965년 베트남전에 참전해서 큰 부상을 입는데, 그때 동료 병사 둘의 죽음을 바로 눈 앞에서 지켜본 후 그의 정신은 더더욱 흔들렸고, 제대 후에도 약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다 아들 로빈슨이 약과 총을 소지한 죄로 투옥되자 재키 로빈슨은 침통한 얼굴로 인터뷰를 한다. "내 가정이 이렇게 망가지는 것을 모르고 나는 바깥으로만 눈을 돌리고 정신없이 바빴다. 다른 가정이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내 가정은 흔들림 없이 안전할 거라 생각을 했었다. 라며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그 사건 후 요양원으로 들어가 치료를 받던 아들은 스물넷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실의에 빠져있던 재키는 평생 마약과의 전쟁에 힘썼다.
큰아들을 그렇게 보낸 재키 로빈슨은 머지않아 아들의 뒤를 따라갔다. 삼십 대부터 진단받은 당뇨가 심해지고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하고 심장도 약해지고 있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더더욱 죽음의 병색이 짙어졌다. 한 팬은 내가 심장을 주겠다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72년 월드시리즈 시구자로 나온 날로부터 9일째 되는 날 아침 1972년 10월 24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게 된다. 맨해튼 락커 펠러가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지은 리버사이드 처치에서 로빈슨의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25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참석했고, 수만 명의 인파가 로빈슨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로빈슨은 브루클린에 있는 사이프레스 힐 세미트리에 아들과 장모와 함께 잠들어있고, 그 묘를 지나는 파크웨이 이름은 재키 로빈슨 파크웨이가 되어있다.
그를 기념하여 1982년, 199년, 2000년에 기념우표가 발행되었다. 재키 로빈슨 파운데이션과 재키 로빈슨 뮤지엄이 뉴욕에 들어설 준비를 하고 있고, 시티필드 구장에는 42 조형물이 그를 기념하고 우뚝 서있다. 또한 메이저리그는 1997년 그의 등번호인 42번을 영원히 로빈슨만의 번호로 기억하도록 했다. 그 어느 누구도 등번호 42번을 달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매년 단 하루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이 맨 처음 메이저리그 선수로 뛰었던 날을 기념하는 '재키 로빈슨 데이'에 메이저 리그 선수들은 등번호 42번을 달고 출전할 수가 있다. 모두가 똑같이 42번을 달고.. 정말 언제 봐도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