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락웰, 에드워드 호퍼와 함께 미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중 한 명인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은 싼타페의 조지아 오키프 뮤지엄 외에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모마, 휘트니 뮤지엄, 브루클린 뮤지엄, 예일 아트 갤러리, 보스턴 뮤지엄,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휴스턴 뮤지엄, 스미소니언 뮤지엄에도 전시되어있다. 오키프의 작품들과 그녀의 삶의 흔적을 되짚어 보는 브루클린 뮤지엄 특별전, 정말 기대 그 이상이었다. 브루클린 뮤지엄 4층 특별 전시장, 조지아 오키프의 대형 포스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구에 들어서니 오키프의 오랜 친구가 남긴 말이 적혀있다."Georgia O'Keeffe has never allowed her life to be one thing and her painting another."
조지아 오키프는 (1887-1986) 위스콘신 선프레리의 부유한 농장에서 일곱 명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쭈욱 중서부 지역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으며, 1905년부터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서 미술 공부를 했고, 1907년에는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미술공부를 했다. 뉴욕 아트 스튜디오에서 같이 공부했던 친구 힐다 벨처가 그린 조지아 오키프의 초상화도 전시되어 있었다. [The Checkered Dress by Hilda Belcher, 1907], 역시 같은 친구 화가가 그린 오키프의 초상화 [Portrait of Georgia O'Keeffe, 1908 by Eugene E. Speicher]
학창 시절 사진과 그림들도 많다. 1912-1914년 사이 그린 그림, [Woman with Blue Hat, 1916-1917]
공부를 마친 후 사우스 캐롤라이나와 텍사스에서 미술교사로 일하며 자신만의 색다른 화풍을 시도했다. 이어 뉴욕에 왔을 때 '갤러리 291'의 주인이자 사진작가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와의 인연이 시작된다. 스티글리츠는 당시 열렬한 현대미술의 후원자였는데 오키프의 그림에 감동을 받아 그녀의 그림 열 점을 갤러리에 전시하게 된다. 당시 오키프보다 23살이나 많던 53세의 유부남 스티클리츠는 당시 자신이 작업실로 쓰던 달빛이 잘 보이는 뉴욕의 아파트를 오키프의 작업실로 맘껏 쓰라고 하고 그때부터 물질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오키프는 스티글리츠의 누드 사진모델이 되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파격적인 누드전으로 화려하게 뉴욕 사교계에 데뷔를 한다. [조지아 오키프의 초상, 1922]이라 이름의 사진전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명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뉴욕 예술계의 인사였던 스티글리츠는 1923년부터 본격적으로 오키프의 작품들로 전시회를 준비하고, 이듬해는 6년간의 동거생활을 청산하고 부부가 된다. 1927년 오키프의 첫 개인전을 바로 이곳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개최하게 되는데, 그 전시회를 위해 스티글리츠가 브루클린 뮤지엄 큐레이터와 교환한 서신도 전시가 되어있다. 1925-1927년 사이 제작된 조지아 오키프 조각상은 현재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 소장되어있다.
그즈음 뉴욕의 성공적인 화가 대열에 들어선 오키프는 커다란 꽃그림을 주로 그렸다.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너무나 바빠 꽃을 볼 시간조차 없다. 꽃은 너무나 작고 누구도 자세히 꽃을 바라보지 않는다. 시간이 없다. 내가 꽃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뉴요커들이 꽃을 바라보기를 원했다"라는 말을 남겼다. [Black Pansy & Forget-Me-Nots (Pansy), 1926]과 [yellow Leaves, 1928]
오키프는 스티클리츠의 본가가 있던 뉴욕 레이크 조지 저택의 숲 속 작은 오두막에 작업실을 꾸미고 작품 활동을 하게 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홍크와 함께 뉴욕의 휴양지로 손꼽히는 레이크 조지의 작업실을 그린 그림 [My Shanty, Village of Lake George], 언제 봐도 참 좋다. 오키프와 스티글리츠가 사랑했던 뉴욕 레이크 조지로의 여행, 정말 좋았다. [Pool in the Woods, Lake George, 1922]
또한 뉴욕 곳곳의 풍경과 고층건물을 아름답게 그리며 점점 인기와 명성을 얻게 되었다. 워싱턴 D.C. 의 스미소니언 뮤지엄 소장된 [Manhattan, 1932] 은 1932년 모마 전시를 위해 60명의 화가들이 대형 벽화를 위해 만들어던 그림이라고 한다.
하지만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갤러리의 후원자이던 재벌 부인과 불륜에 빠진 것을 알고, 1929년 뉴멕시코로 떠나게 된다. 처음 경험해보는 뉴멕시코 특유의 황량함과 광활한 자연은 오키프의 색채와 화풍을 크게 변화시켰다. [Hills-Lavender. Ghost Ranch, New Mexico, 1935]와 [Ram's Head with Hollyhock, 1935]
뉴욕과 뉴멕시코를 오가며 생활했던 오키프는 스티글리츠가 사망하고 3년 뒤인 1949년, 뉴욕을 완전히 떠나 뉴멕시코에 정착한다. 그때부터 삭막한 사막 뉴멕시코에는 전 세계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950년대 오키프는 세계여행을 시작했으며 특히 페루 마추픽추, 일본 후지산 등은 큰 영감을 불러있으켰다.
73세에는 하늘의 구름과 강을 소재로 새로운 화풍을 시작했다. 1972년 이후 조금씩 시력을 잃어간 오키프는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잔심부름도 하고 일을 도와주던 50세 연하의 주앙 해밀턴에게 흙으로 도자기 빚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13년 동안 그와 보낸 후, 98세의 나이로 1986년 3월 6일 산타페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2,000여 작품과 막대한 유산을 해밀턴 앞으로 남겨 소송이 걸렸다. 소송이 마무리되고 그녀 이름을 건 조지아 오키프 뮤지엄이 뉴멕시코 싼타페에 1995년 오픈했고, 말년에 살던 집도 대중에게 오픈이 되었다. 앤디 워홀의 1980년 Georgia O'Keeffe 에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가루가 뿌려져 있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점은 오키프가 직접 제작해 입었던 옷들까지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실크, 면, 울 등의 소재가 주는 본연의 감촉을 사랑했던 오키프는 최소한의 장식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식대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오키프는 옷을 통해 독립적인 예술가로서의 자신을 표현할 줄 알았다.
특히 여성이라는 사실 때문에 너무나 많은 불평등과 제약을 감수해야 했던 오키프는 1926년에는 퍼스트레이디인 엘리너 루스벨트의 워싱턴 집회에도 참가하는 등, 여성 평등을 강조하며 여성해방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림뿐 아니라 옷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나 또한 감탄하면서 관람을 했다.
따뜻한 색감으로 가슴이 설레는 그림 [달을 향한 사다리 Ladder to the Moon, 1958] [여름날 Summer Days, 1936] 등 13점은 휘트니 뮤지엄이 소장하고 있다. 구름을 소재로 그린 [구름 위 하늘 Above the Clouds, 1962-1963] 시리즈는 조지아 오키프 뮤지엄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서 만날 수 있다.
1996년에는 오키프의 사망 10주년을 기념하여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 [붉은 양귀비 Red Poppy, 1928]을 모델로 32센트 기념우표가 발행되었으며, 2013년에는 뉴욕 아모리 쇼 백주년을 기념하여 [Black Mesa Landscape, New Mexico / Out Back of Marie's II, 1930] 우표가 발행되었다.
그 이듬해인 2014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는 조지아 오키프의 [흰 독말풀/흰 꽃 Jimson Weed/White Flower No. 1, 1932] 가 $44,405,000 (한화 495억 원)에 낙찰됨으로써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린 여류화가의 작품으로 기록이 되었다.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들에 대해 설명이 아주 잘 되어 있는 책도 있다. [Georgia O'Keeffe]라는 제목의 이 책의 표지 작품은 [Jack in the Pulpit No.3, 1930]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