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쳐지나간 인연 중에, 이름도 모르는데 그리운 사람들이 있다. 그리운 이유는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연을 이어가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있는 것 같고, 연을 잇지 못한 이유가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후회도 있는 것 같다.
대학교 이 학년 겨울 방학 때였나, 나는 인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자이살메르'라는 도시에 있었다. 낙타 사파리 투어를 하려고 어느 게스트 하우스 접견실 낡은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건너편 소파에 어떤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어깨까지 오는 갈색 머리의 그 애는 하얀색 벙거지 모자를 쓰고 있었고 하얀색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애의 양 옆에는 남자 둘이 붙어있었는데 서로 그애와 어떻게 해보려는 듯 그애에게 찝적대고 있었다. 벙거지 모자 아래로 보이는 그 애 얼굴을 보니 그럴만 했다. 눈이 사슴처럼 컸고 그냥 누가 봐도 예쁘게 생긴 그런 얼굴이었다.
아니 이 무념무상의 인도에서(당시 류시화에 영향 받음),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겠다고 낙타 사파리를 하러 왔으면서, 저런 꼴불견이라니. 셋 다 세트로 꼴보기 싫었다. 그때는 그 애가 곱게 자란 여자아이 차림새를 하고는 속으로그런 남자들의 추근댐을 즐긴다고 생각했다. 낙타 사파리를 하러 왔는데 쉽게 더러워지는 하얀 옷을 입고 온 게 남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면 뭐냔 말이냐. 으 내숭쟁이, 이랬다.
사파리를 할 때는 그 애를 보지 못했다.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이미 그 애를 관심 밖에 두어서 못 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별로 가득찬 밤하늘을 눈에 한껏 담고 나는 자이살메르를 떠났다.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후 나는 인도의 동쪽 끝에 있는 도시인 캘커타에 있었다. 혼자 도시를 배회하던 중 우연히 그 애를 다시 만났다. 한국인인 게 눈에 띄어서였는지 그 애가 먼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하세요.”
그 애의 이미지는 그 날과는 완전히 달랐다. 모자는 쓰지 않았고 활동하기 편한 반팔티와 긴바지를 입고 배낭을 메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참 씩씩했다. 그 애는 나를 처음 봤다고 했지만 나는 자이살메르에서 낙타 사파리할 때 봤었다고 얘기했다.
그날 우리는 하루 종일 같이 다녔다. 나도 혼자였고 그 애도 혼자였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혼자 여행하다보면 외로워지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한 법이다.
그 애는 엄청 많이 먹었다. 음식점에 들어가면 하나를 시키는 법이 없었다. “이거랑 이거랑 이거 시킬까요?” 우리둘은 항상 세 접시를 시켰고 음식이 그득 담긴 접시를 항상 깨끗하게 비웠다. 나는 그 애가 주도적으로 음식을 넉넉하게 시키는게 너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쿵짝이 잘 맞을 수가. 나처럼 많이 먹는 여자애는 처음 봤다.
어느 잔디밭에 앉아서 어떻게 혼자 여행오게 됐냐, 같은 얘기를 나눴다. 부모님이 반대했는데 엄청 졸라서 왔다고 그 애는 하루에 한 번씩 부모님한테 연락드리고 있다고 했다. 인도에 너무 와보고 싶었다고 했다. 되게 곱게 자랐을 것 같고 얼굴도 이뻐서 한국에서도 인기 많고 부족함 없이 자랐을 것 같은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하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
같이 있는데 그 애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다. 전화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언뜻 들렸는데 그 남자가 그 애에게 자신이 캘커타에 왔으니 만나자고 하는 것 같았고 그 애는 핑계를 대며 만남을 피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시원하게 “귀찮아 죽겠네”라고 했다. 알고보니 그 애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자들에게 그저 인간으로서 예의를 다했을 뿐 내숭 떠는 타입이 결코 아니었다. 그 애는 남자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 애의 관심은 테레사 수녀님에게 있었다. 캘커타에 있는 테레사 수녀님의 성당에 같이 갔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성당에서는 봉사할 사람을 모집하고 있었고 그 애는 너무 하고 싶다면서 지원했다. 내가 가장 후회스러운 부분은 이것이다. 그애가 같이 하자고 했는데 거절한 것. 그때 나는 힘든 일이 하기 싫었고 며칠씩 묶여서 고생하고 싶지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후회한다. 그 애는 접수를 하러 들어가고 나는 성당을 나오는 것으로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다.
그 애는 예뻤다. 내면은 멋졌다. 첫인상이 얼마나 틀릴 수 있는지를 그 애를 보고 알게 됐다. 나는 이름도 모르는 그 애를 가끔씩 떠올리며 그리워한다. 그 애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아직도 대식가인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지 궁금하다.